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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은희 Sep 01. 2023

산티아고일기(2023/01/23): 순례 23일차

천천히 아끼면서 걸어낸길(트리아카스텔라 to 사리아 24.8km)

1. 괴로운 밤 해프닝


어제도 힘든 밤. 하필이면 내 잠자리가 역대급 코골이 러시아 청년과 음량은 덜했지만 파장이 다른(그래서 서라운드로 더 괴로운) 유대인 코골이 청년 중간 이었던지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몇 번이나 저 옆의 녀석을 깨워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는 ㅠㅠ 알베르게 집단숙박의 단점 중에 최고 단점이 이것이다.


예전 한국인 코골이 청년에게는 3일밤 내내 엄청 센, 밤에 먹고 자면 기절하는 수준의 스페인산 감기약을 먹였더랬다. 이 약 잘 드니까 같은 상표로 꼭 사요~ 그 신호였는데, 그 청년 3일 동안 고맙습니다하며 약만 잘 받아먹더라는. 아침에는 해맑게 선생님 덕에 잘 잔 거 같아요 인사도 받았다. 


사실 두번 째 나의 점핑의 숨은 이유 중 하나가 이 청년과 같이 다시는 못 자겠다는 회피의 마음도 있었다. 

다들 피곤하니 코고는 거 냄새 나는 건 이 길을 걷는 동안 견뎌야 할 난제이다. 이 난관 통과할 자신 없으면 이 순례여행은 안 맞는 것이고, 그래도 정 걸어야겠다면 집합숙소 알베르게 아니라 호스텔이나 호텔 개인 숙소를 잡아야한다.


근데 이게 불평하기 어려운 것이 나도 코 곤다. 어제는 일찍 숙소 체킨해 나도 한 시간 정도 깜박 오후잠에 들었는데, 잠꼬대 + 신음 + 코골이 3단 콤보세트로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을 놀래켰다가 웃겼다가 한참을 그랬다고. "헉. 욕은 안했어요?" K샘에게 물으니 그러지는 않았다고. 나도 다른 이들에게 불편을 끼칠 가능성을 확인했으니 이제 더이상 불평불만을 품지는 말아야. 그래도 어젯밤은 아우 너무 심했다. 


이렇게 잠을 설치는 날에 몇가지 실용적인 대책이 있다. 첫째, 이어폰 꽂고 나에게 맞는 음악 크게 틀고 자기.(내 경우엔 수면빗소리가 효과적.), 둘째, 자던 중간에도 잠오는 감기약 먹고 기절해 버리기, 셋째, 오히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움직이고 오전오후 카페인 충분히 충전할 것. 


상대적으로 평탄한 구간이라 신발끈 조여 매고 8시 조금 못 되어 길을 나선다. K선생도 어젯밤 잠자기 힘들었다며 걷다가 2번 이상 바(커피숍) 들르자며 아침 일찍 따라 나선다. 그제는 산동네여서라지만 갈리시아 구간에서는 아침 출발 때 기온이 계속 영하권일 것으로 나온다. 피곤이 쌓여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오히려 찬공기가 잠 깨우는 데는 도움이 된 듯하다. 


2. 다채로운 경관, 아까워서 천천히 걸었던 길


곧 두 갈래 길이 나온다. 하나는 7km 정도 돌아가는 조금 평탄하고 예쁜 길, 다른 한 길은 출발지 기준 고도 400m 정도 상승 하강운동을 해야하는 산 길. K 선생이 오르막 오르는 걸 주저해서 좀 돌더라도 평탄한 길로 가기로 한다. 내 기준에서도 18.1km는 좀 싱거운(? 좀 덜 걸은듯) 느낌이 들어 24.8km 사모스 마을 지나는 길 걷는데 동의. 오늘도 6일차인데 합이 잘 맞는 분이라 앞으로도 쭉 같이 걷게 될 듯 하다.


이 길을 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너무나 만족스런 선택.

오늘도 풍경이 다 한 날!


오전에 지나친 마을들은 계속 그랬듯이 동면에 든 듯 했지만 그래도 저지대고 도시에 가까운 곳들이다보니 굴뚝에 연기 오르는 집들이 서너집 정도로 늘었다. 오전엔 대체로 산그늘 속에서 지붕도, 밭도, 집앞 정원도 푸르스름한 냉기에 갇혀있다. 대체로 강을 끼고 있는 구간인데, 지난주 폭설이 위에서부터 녹아내려 강물 소리가 우렁차다. 다행스러운 건 하늘빛이 맑고 새소리가 아침부터 요란한 걸 보니 낮에는 기온이 좀 오를 것 같다.


하늘은 높고, 밭은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하자 성에가 점점 산쪽으로 물러날 게 느껴진다. 양달로 바뀐 곳의 겨울밀과 화초에는 빛이 굴절해 반짝거리는 이슬방울이 맺힌다. 


지나는 곳에는 수확이 끝난 옥수수(갈리시아 중산간 높이에서는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짓는다고) 밭과 양, 소, 염소 방목지가 넓게 펼쳐져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풀 뜯는 소떼를 보게 되었는데, 서걱서걱 소 풀 뜯는 소리가 너무 좋아 한참을 보고 서 있었더랬다(영상 있음~ 듣고있으면 힐링되는 자연의 소리!)


아, 그리고 하늘!!! 기온이 높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래서 더  청명한 하늘도 실컷 즐길 수 있었다. 아까운 기분이 들어 이 구간의 자연+인문 요소를 실컷 즐기자 싶었다. 


그래서 천천히 아끼면서 걸어낸 길.


3. 생각보다는 마음 정리


실은 오세브레이로(마지막 고개 구간. 갈리시아 첫 마을) 이후로 마음이 무거워지고 생각이 많아지고 있다. 현재 속도면 빠르면 금요일, 늦어도 토요일에는 산티아고에 들어갈 수 있다. 순례의 끝이다. 동시에 나의 석달 유럽에서의 방랑도 곧 끝이 난다. 순례 끝나고 3일 뒤인 31일 밤에는 한국행 비행기가 예정되어있다.


다시 내 세계로의 복귀. 

아무 것도 결정된 거 없는 불투명한 일상으로의 귀환.


생각도, 미래 계획도 아직은 불투명한데, 여전히 나는 큰 질문들에 마주하지 못한 거 같아 마음이 복잡해진다. 큰 일이네......

생각이 복잡해지니 발걸음도 빨라졌다 느려졌다 리듬감을 놓치게 된다. 그렇게 지난 3일 종종 스텝이 꼬여갔는데, 미래에 관한 질문과 인생의 과제에 대해 오늘은 임시방편이지만 봉합을 해본다.


내가 품은 질문은, 내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일상과 동떨어진 이 길 위에서는 해결 안 되는 것들이다.


나의 질문과 숙제는

사회적인 것, 관계 안에서 제기되고

관계 속에서 풀어야하는 매듭같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길의 끝에서 뭘 내 것으로 가져가야할까?


오늘의 잠정 결론은 이렇다.

내가 이길의 끝에서 만나야하는 건 

말끔한 해답이 아니라,

일종의 마음가짐이나 태도 같은 것일 수 있겠다.


예를 들면,


- 인생의 질문과 과제를 마주할 용기,

- 기존 직업 세계에서 나의 정점은 (어쩌면) 이미 지나가버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

- 특별한 사람이 되지 못한 자괴감을 내려놓고 평범하게 살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자존감(탐라에서 자주 본 <어른 김장하> 소개글에서 힌트를 얻음),

- 그렇지만 학인의 삶, 대신 책만 파는 건 아니고 인간관계와 길 위에서 관찰하고 질문하며 공부하려는 노력만은 지속하겠다는 다짐,

- 말은 줄이고 지갑은 여는 어른의 태도(아, 그러면 돈도 어는 정도는 계속 벌어야 하는 구나ㅠㅠ),

- 내 딸세대와 후배세대에게는 친절한 선배이자 책임질 줄 아는 어른이 되어갈 준비,

- 사회의 불의와 개인의 과오를 외면하지 않고 인정하려는 자세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

답 없는 질문 때문에 괴로워하지말고,

현재를 즐기고 현재에 충실할 것.


지금 이 순간 내가 서 있는 곳은 목적지가 멀지 않은 순례길 위이다. 오늘 그리 하였듯이, 무리하지말고 남은 길 아껴가며 천천히 걸어가 보기로. 길 끝에는 무지개도 파랑새도 없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뭐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기만은 기대해 보려하는 데 그것 역시 외부환경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해야하는 일. 그러니 그런 용기를 꿈꿀 수 있을만큼 내 마음을 더 응시해 볼 것!



이른 아침 산골마을의 푸른 기운이 좋다.
산그늘이 짧아지고 있다
사모스의 수도원. 갈리시아 주는 순례길에 더 정성을 기울이는 듯. 하천 위 교각 장식이 조가비 모양
해가 높어지고 성에는 훌쩍 물러섰다
오늘의 길동무 샷
양털 벗겨내 얇쌍한 양떼들. 한참 바라보며 사진 찍으려 하니 양몰이 개가 뛰어오며 짖어댄다. 그래 너는 너의 일을 하려무나.



Kim Myung-hwan  코골이 청년들 땜에 잠 못자고 괴로워하다가 새벽에 일어나 이런 풍경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들지... ^^ (두 사람의 스테레오 코골이에 잠 못 자본 적 있는데, 정말 장난이 아니더군요. 중학 시절 집 마루 연탄난로 곁에 걸어둔 빨래 때문에 집에 불이 나서 온 가족이 난리였어도 혼자만 잘 자고 일어나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냐? 하던 저였는데...ㅋ )

  ==> 관에서 힘을 얻어요. 푸르스름하지만 저것도 빛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사람이 산다. 부지런히 집을 덥혀 하루를 시작하는 집주인의 행복도 막 빌어주고 싶고. ㅎ

김현종 세라비~~

==> 목적지가 있는 이번 여행은 어쩌면 쉬운 길. 그래서 길 위의 과정이 더 소중하네요.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김태완 멋진 길동무들이 많네요. 빡세게 걸으면 남 코고는 소리가 안 들리고 내 코고는 소리에 놀라 깨기도 할텐데. 지리산 산장에서 자던 밤이 생각나네요

  ==> 위에 그리 써놓고 여전히 저도 현재에 집중하지 못해 남탓하고 싶어졌나봅니다. ㅎ 길 위에서 멋진 인연 많이 만난 것도 이 여행의 보람^^

박대훈 난 16베드에 러시아 사람과 단 둘이 묵은 적 있는데, 방이 크고 사람이 적으니 코고는 소리가 더 크게 울려서 잠 못잔 기억이^^

  ==> 어디서든 잠은 잘 잡시다. 현재에만 충실하면서 ㅋ

Jinyoung Kwak 걸어도 답을 얻지 못할 거란 걸 너도 이미 알고 있었을테지만 그래도 순례에 나섰고. 너는 다른 귀한 것들을 깨닫고, 네 글을 읽는 많은 이에게 나눠주고 있구나.

  ==> 앞으로 계속 실천이 더 중요하죠 ㅎ

윤신원 남은 기간 아프지 않게, 건강히 돌아와. 구체적인 답을 내리려 하기보다 바람 불듯, 물 흐르듯, 해길이가 달라지듯 인생도 흐름이 있을테니 자신에 대한 믿음을 단단히 하고 오면 좋을것 같아. 글을 보면 이미 경지에 오른듯~^^

  ==> 계획없는 가족여행길에서 선배도 행복 찾기를~ ㅎ

Jongmi Kim 순례길은 떠나본적 없지만, 저는 결혼이라는 것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이 너무 되서 그냥 무작정 비행기티켓을 끊어서 2주간 한 도시에 머무른 적이 있어요. 이미 나의 답은 내 맘에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가 싶더라고요. 떠나기 전에는 한다. 다녀와서는 안한다. ㅎㅎㅎ

그리고 수년 후 지금 신랑이랑 결혼을 한거 보면, 그 사람하고 결혼하는 것이 망설여졌나봐요. ㅎㅎ

어떤 고민이신지는 모르지만 걷는 길 위에서 그 마음을 찾으시길 함께 바래봅니다!

오늘도 내일도 부엔 까미노!!

  ==> 동감동감. 저도 그럴 때 많아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거 결정에 시간이 걸리는 것일 때가 많지요. 내 마음의 갈피를 잡고 결정의 가르마를 탈 시간. ^^

Miae Lee 유학 중 아들 사춘기가 심해 주변 조언으로 산티아고 7-10일 코스 찍으려다 아이 사춘기의 급격한 악화 모드 돌입으로 병원 우선이어서 예약 취소하고 결국 실행 실패했네요. 못걸었지만 샘의 고민과 다짐들 ‘날로’ 얻어갑니다. 고맙습니다. 몸 마음 건강한 한해 되세요.

  ==> 감사합니다. 오프에서도 함 뵙고 싶어요. 한국 들어가면 연락드리겠습니다!

Sumi Park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이 필요하다. 목에 걸어도 짐이 되긴 하겠으나^^;

  ==> 버즈는 잃어버릴 거 같아 줄 달린 가장 싼 이어폰 들고와 하나 잃어버리고 비슷한 거 하나 더 사 들고 다니는 중. ㅎ 며칠 안 남았으니 잘 견뎌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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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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