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객, 온기를 나누는 사람(오세브레이로 to 트리아카스텔라 22km)
1. 갈리시아를 걷다. 아직은 산 동네
어제 1340m 고지를 넘어와 이번 여정의 마지막 주인 갈리시아 주에 들어왔다. 갈리시아주는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드콤포스텔라가 있는 곳. 사시사철 순례객들이 찾는 곳이라 관광업도 중요하지만 산업적 측면에서는 어업이 중요하다. 대서양 바다를 끼고 있어, 갈리시아식 문어, 홍합, 오징어 등 해산물 요리로 유명한 주. 물론 이 요리들은 이제는 순례길의 명물 혹은 스페인 전국구요리로 올라선지라, 레온주에 들어선 이후에는 어디서든 맛난 해산물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어제의 숙소는 산꼭대기. 뾰족한 봉우리가 아니라 넓은 고원지대에 자리한 공립 알베르게였다. 이런 겨울철 문열어 준게 고마운 365일 오픈하늘 곳. 오늘은 내리막길 22km를 걷는 길. 5시간 안팎 걸리겠구나 생각해 조금 여유있게 날 밝은 후 출발한다.
오늘의 목적지는 해발고도 600m 아랫동네에 있는데, 순례길의 절반 정도는 고원길을 걷다가 절반을 넘어선 다음에야 내리막길이 시작한다. 그래서 출발 후 아주 한참은 산동네 경관을 즐길 수 있었다.
2. 산동네 경관 : 농업+ 광산+ 겨울잠 자는 산 마을
산동네는 당연히 농촌경관이 지배적이다. 높은 고도의 산 정상부까지, 돌담으로 구획된 밭들 혹은 소나 양 방목지가 넓게 펼쳐져있다. (오늘도 와~ 제주랑 비슷하다) 성에를 안고 있는 겨울밀밭의 차가운 푸른 기운이 인상적이다.
물론 사람사는 곳에, 경제활동 이뤄지는 곳이 그저 낭만적이거나 예쁘지만은 않다. 당연히 축사 옆을 지날 때는 분뇨냄새 심하다. 며칠 전부터 고압송전탑이 많이 보이고, 흙의 속살이 드러나는 노천광산도 보인다. 사진 찍을 때는 되도록 송전선로, 전기줄, 광산 등 안 보이게, 예쁘고 멋진 경관만 프레임에 담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 그렇지만 오늘은 있는 그대로 찍고싶은 생각이 든다. 시즌엔 관광업도 중요하겠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로컬 사람들에게는 그런 산업이 일상을 살아가게 하는 것들터니. 지나가는 나그네의 사진에서는 지우고(적어도 포함시키지 않고) 싶은 것들까지가 까미노인 것을.
3. 빈 동네를 지나는 마음
겨울 까미노의 장점도 많지만(여유롭다, 혼자될 수 있다, 메세타 구간 넘기 좋다 등), 숙소 구하는 것은 역시 큰 문제. 순례객들이 하루에 이동하는 거리가 대체로 어디쯤에서 열린 숙소를 만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규모 있는 동네에도 문 연 알베르게가 한 두개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택지 없이 한두 숙소로 몰려드니 작은 방 인구밀도 높아지고, 만났던 이들 계속 만나게 된다.
전체 순례길 경로에서, 예외도 물론 있지만, 마을은 대략 4~5km 마다 하나씩은 있다. 시즌엔 그런 마을에도 알베르게가 서너개씩 손님을 받고, 점심저녁 혹은 간식 챙겨 먹으려는 이들을 위한 바나 레스토랑 기념품 샵까지 활기가 넘쳤을 것이다.
하지만 겨울엔 다르다. 지붕 굴뚝에서 연기 올라오는 집들이 한 두곳 있기는 하지만, 거점 마을 아닌 곳들은 대부분 동면 상태. 스페인 전체로 보면 산티아고길(프렌치로드)은 북부 인구희박, 완전 시골을 지나는 길. 그러니 어떨 때는 마을 전체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오늘도 그런 날. 하산 하는 동안 지나친 마을이 대여섯 개 되었는데, 바나 레스토랑이 열린 곳을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방 깊은 곳에 박혀 있던 초코바 하나 꺼내먹은 거 외에는 아침점심을 건너뛴 채 쫄쫄 굶으면서 내려와야만 했다는 ㅠㅠ (대체로 이런 경우를 대비해 전날 숙소 근처 마트에서 다음날 간식(주로 만다린+ 비스킷)을 사둬야하는데, 어제의 산꼭대기 마을에는 마트도 5시에 문을 닫아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마을이 비어있는데 최근처럼 눈이 많이 내리면? 당연히 눈 치울 사람 없이 눈만 쌓인다. 고도가 높으니 눈은 쌓인 상태로 얼어버린다. 밟으면 푹푹 빠질 것처럼 보이는 눈 밭이 실은 얼음판이었다는. ㅠㅠ
그런 길에서 자빠지는 일도 다반사. 저 앞에서 넘어지는 사람보며 주의하자 싶었는데, 나도 결국 한 번 쿵하며 자빠졌다. 배낭 때문에 거의 뒤짚힌 거북이처럼 버둥댔는데, 엉덩이 멍든 거 조금 외에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 배낭이 오히려 보호막이 되어준 셈. 액땜이라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주의하기로!!
넘어졌다 일어선 후, 겨울철 이런 마을은 들어가지 않도록 안내가 되어야하는 거 아닌가 한참을 궁시렁거렸다. 다시 생각하니 마을 자체가 비어있는데, 주의 안내를 붙이고 통제할 인력도 없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겨울 마을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노인과 개 고양이 뿐이다. 그런데 그런 어르신들과 마주칠 때면 부엔 까미노 외에 그라시아스 포르 비지타(찾아줘서 고마워~)라는 인사를 받을 때가 있다. 길에서 위로 받는 건 순례객인데, 로컬 사람들 입장에서는 겨울철이라도 자기 마을을 지나가주는 방문자가 반갑고 고마운가 보다.
그러면 바쁘게 지나칠 마을에서도 걷는 속도를 줄이고, 마을의 이목구비를 한 번이라도 더 살피게 된다. 오늘도 눈 때문이지만 걷는 속도는 느려졌고 어쩔 수 없이 마을의 이곳저곳을 살피게 되었다. 그러니 오래된 종탑, 잘 정돈된 순례자를 위한 표식, 미소짓게 하는 환영의 장식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또다시 적잖은 위로를 받게된다.
사람의 온기가 멈춘 건물과 마을은 낡았다는 인상을 풍기게 마련이다. 오늘은 겨울 순례객은 자신의 온기를 그런 마을에 나눠주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내가 잠시 스치며 남기고 온 온기가 그 마을이 겨울을 버틸 힘이 될 수 있기를.
이런 생각을 하니, 이 길에서 얻는 게 많은 사람이지만, 주는 것도 있는 사람이 된 기분 ^^
윤신원 오늘 이야기는 못먹고 넘어지고 걸음도 느려지고… 그런데도 온기를 나눠주는 이야기네. ^^ 읽는 이에게도 따뜻한 위로가 된다. 건강 잘 챙기고~
===> 하루 하나씩 긍정적 요소를 찾아보려고요^^
Ilho An 성경의 야고보 같으세요... ^^
==> 이길이 바로 그 야곱을 따르는 길입니다~^^
김영옥 몸조심하시며 살살 다니셔요~♡
김태완 종주 끝날 시점이 가까워 오는 것 같네요. 힘내십시오
==> 네.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지네요~
김익배 막판에 더조심해야 하는거 아시쥬
==> ㅎ 어제 넘어진 거로 액땜. 앞으론 평탄길이예요.
이명주 감사합니다.
Jinyoung Kwak 초코바 하나로 버티며 걷다니.. 나는 상상도 못하겠다. 대단!
==> 살다보니 이런 날. 근데 옆에서 다 버티니 저도 같이 되요~
==> 매일 매일 아름다운 이야기 올려주고 주옥같은 말씀으로 나의 성찰을 도우니 너 돌아오면 이 언니가 맛있는 거 먹여줄게. 쵸코바로 주린 배 기름지게 해주리라.
한도현 Rural exodus가 참 심하군요. Basque의 산골엔 작은 타운들이 일찍 공업을 일으켜 작은 공장들이 일자리를 만들어 동네 활력을 유지하는데, 많이 대조가 되네요. 인문지리/경제지리에서 비교연구해야할 중요주제군요. Bilbao의 요리선생이 Galicia출신이어서 갈리시아는 가깝게 느껴지네요. 건강하고 즐거운 pilgrim되세요... 인생 자체가 낯선 땅에 온 Pilgrim 겉죠?
==> 네. 지나고 보니, 바스크의 경제 수준이 산티아고 순례길 안에서도 나쁘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영토 규모 대비 인구가 적은 나라니 지역별 인구소멸이 여기도 걱정될 듯. 우리의 근미래일 듯도 해서 걱정되네요~
Kayoung Ko 명절에 한반도에서 보기 어려운 자유부인의 모습입니다. ~~~
=> 한국 있었어도 자유부인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