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미사, 길동무 리유니온(산티아고드콤포스텔라)
1. 순례의 마무리
순례의 마지막에는 두 가지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다. 순례자 증명서 발급받기 그리고 순례자미사 참석.
증명서는 성당 인근 국제순례자센터에서 3유로를 내고 받을 수 있다. 금요일 도착이지만 아직 순례자 미사 참석 전이니 토요일자로 발급받는다. 23년 1월 1일 생장피에드포흐 출발 1월 28일 산티아고까지 두 발로 걸어온 사람. Eunhui Rosa Eom이라는 이름을 적어두었다.
지난 20년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에게 (내 이름이 워낙 외국인이 발음하기 난망한 지라) 로사라는 이름을 가르쳐주었더랬다. 세례명이기는 하지만 종교적 의미보다는 닉네임으로.
스무살 이후 희한하게 성당 발걸음을 딱 끊었다. 94년 명동 성당에 단식투쟁하러 3주 가까이 머물렀던 것, 시댁 장례 미사, 누구 결혼식 때가 아니고선 미사에 제대로 참석한 적이 없었다. 기억이 있는 유년시절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생활세계의 상당부분에 성당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리 한순간에 발을 끊었은까? (믿기 어렵겠지만, 제가 10대 때 한참을 수녀될 생각을 했던 사랑입니다. 이성친구를 참 좋아하는 걸 깨닫고 포기 했지만 ㅋ) 지난 연말 동생하고도 이 얘기를 했는데. 등생도 그렇다고. "고해성사로 해결 안 될 사고/잘못을 저지르고 다니니 성당을 못 가는 거지."라는 이유를 댄다. 그럴 수도.
인생에서 신앙 없는 세속적 생활을 해온 세월이 더 길고, 누가 종교를 물어와도 종교 없다고 말해왔었다. 그래도 성당이란 공간은 꽤 좋아했다. 미사때가 아니라 개방된 공간에 앉아 가만히 있는 시간이 좋았다. (공간만 따지면 성당만큼/보다(?!?) 절집도 또 좋아하긴 했지만). 그런데 지난 석달 파리체류와 순례길에서 여러 번 미사에 참석했고 그러면서 전례의 형식미가 아름답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오랜 기간 유지되어 온 전례의 절차들, 스테인글라스를 통과한 빛의 향연, 파이프오르간의 웅장함, 찬송을 선창하는 수녀님의 청아한 목소리. 한국도 전례의 기도문이 많이 순화된 걸로 알고 있는데, 전례 구성 자체도 집전하는 신부 외에 신도들의 참여 부분이 늘어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나이가 먹나 변하지 않고 지켜지는 절제미나 형식미에 마음이 끌린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는 다시 교회를 찾게 될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10년 전 어느 인생 위기의 시점에도 지금이 그 때인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보다 한 살 위 전 성당오빠이자 현 가톨릭 사제에게 대화를 청한 적이 있다.
ㅡ 요한 신부, 나 다시 성당나갈까봐.
ㅡ 왜? 무슨 일 있어?
ㅡ 사는 게 힘들어. 세상이 이상해, 방황 좀 덜 하고 싶다.
ㅡ 요새 화가 많이 쌓이니?
ㅡ 어, 그런거 같어. 옳고그름이 뒤죽박죽이잖아. 어떻게 하지?
ㅡ 로사야. 힝들 땐 일기를 써. 너 같은 신자 성당 나오면 그 본당 신부도 피곤하다. 그 신부 뭔 죄냐?
ㅡ 아니. 요한 신부 그게 무슨 말? 방황하는 어린 양이 다시 주님한테 간다는데!!
ㅡ 솔직히 너가 어린 양은 아니지. 머리만 큰 어른 양은 일단 자기성찰 먼저 하시고. 살다가 진짜 니 발로, 니 마음으로 성당 오고 싶을 때 그 때 와도 괜찮아.
그 때가 지금인지는 모르겠지만 올해부터는 다시 성당에 나가볼 참. 한국의 복잡한 사회생활에 얽매이게 되면 마음이 변덕을 부릴 수도 있지만, 지금의 기분으로는 그렇다.
다시 순례자 미사 이야기로 돌아가자. 산티아고 대성당에서는 매일 12시 순례자미사가 거행된다. 전날 정오에서 당일 점오 사이 순례자등록을 한 이들의 이름과 국적을 불러주는.
일요일에는 특별히 향로미사가 열린다. 제대 위 높이 달린 향로에 불을 피워 참석자들의 몸을 향으로 정화하고 축복하는 특별한 이벤트. 1월 까미노에서 만난 이들 사이에 향로미사는 당연 주요화제다. 종교에 무관하게 문화적 체험으로라도 경험해 보고 싶다는. 그래서 많은 경우 토요일 도착 순례자등록하고 일요일 자기 이름이 불려지는 걸 직접 듣고 향로미사도 참석하게 일정을 조정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뭐. 소박한 토요일 미사도 나쁘지 않았다. 대신 미사 시작 전 제대 앞의 양초 봉헌대에 10개의 초를 밝혀두었다. 10주기가 다가오는 아버지 기일 하루 전이라 맨 윗줄에, 요새 건강 걱정이 많은 울엄마와 시엄마, 그리고 나의 두 가족 남편과 내 딸을 위한 초 4개가 두번째 줄, 그리고 우리 다섯 남매를 생각하는 초 5개를 세번째 줄에. 평일미사라 전례도 소박하고 미사시간도 짧았지만, 그리 크지 않았던 양초가 미사 시간 내내 꺼지지 않고 밝혀져 있는 걸 봤다. 이걸로 되었다. 진짜 순례가 끝났다.
2. 길동무 리유니온
기대하지 않은 행운이 한 가지 더. 토요일 10시에 순례자 등록을 하니 성당 앞 호텔레스토랑의 무료 점심 쿠폰을 준다. 오~ 즐거운 마음으로 미사 후 식당에 갔더니, 10인용 테이블로 안내해준다. 알고보니 매일 선착순 10명에게만 제공되는 선물이다. 메뉴 선택권은 없지만 어쨌든 운좋은 선물이니까. 6명이 사이좋게 앉아 각자의 순례 경험을 나누며 한 끼의 식사를 함께 나눈다.
점심 먹고 다시 노곤노곤해지는 참이지만, 함께 걸었던 다른 순례객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특히 K선생님
ㅡ 도착했을 거 같은데, 선생님 지금 어디?
ㅡ 어 저 지금 여기요. (메세지와 함께 대성당 앞광장사진이 딸려온다)
ㅡ 오~ 저 1분이면 갈 거리. 지금 갈께요~
이틀만에 길동무를 다시 만났다. 원했던 바대로 순례의 마무리를 고독하게 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는데, 다른 한 편 불편한 잠자리와 불편한 상황(두 명 모두 불쾌한 크지 않은 인종차별과 약한 성희롱?!을 당했고, 소란스런 무리 때문에 고독을 방해 받기도 했음)을 겪으며, 둘이 다니면서 서로 큰 의지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묵은 수다를 나누다 각자 휴식을 취하고 저녁 먹으러 나가기로 했다. 우리 둘 만나면 술도 많이 먹고 과식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지라(나는 주는대로 가까운 선택지 중에 고르는 편인데, K선생은 맛집 찾기의 달인 덕분에 입이 즐거운 여정을 즐겼다) 오늘은 우리 진짜 가볍게 먹어도 다짐하며 길을 나섰다.
원래 계획은 3.5유로 중국볶음밥을 먹는 것. 아~ 그런데 이 가게가 23일부터 휴가다. 주알이라 구글맵 영업시간 업뎃이 안 되었던 모양. 어쩔 수 없지 올라가다 문 연 바 중 맘에 드는데 들어가자 싶었는데, 우리 눈 앞에 근사한 스페인 레스토랑이 나타났다.
ㅡ예약했어요?
ㅡ어. 안했는데. 그럼 우리 밥 못 먹나요?
ㅡ음. 10시 테이블이 하나 있기는 한데, 10시 전에 식사 끝내야 합니다.
ㅡ(지금 시간 8시30분) 물론이죠. 1시간이면 충분합니다.
그렇게 들어간 식당은 알고보니 고급진 로컬 맛집! 가격은 좀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둘다 경제활동 했었던 어른이니까 기분좋게 플렉스 하기로. 둘이라서 가능한 대형철판 빠에야와 무려 리오하 와인 한 병을 신나게 나눴다. 원계획의 10배 되는 지출이었지만 순례완주를 서로 축하하고 새로운 시작을 빌어주는 자리. 순례의 마지막날은 이리 멋진 길동무와 함께 훈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