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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이날 Aug 20. 2021

내가 먹은 것이 내가 된다.

북한 음식 아니예요, 이젠 남한 음식 차려보아요.

결혼을 하고 신랑이 친정에서 밥을 먹는 일이 잦아졌다. 신랑은 장모님댁 음식이 꼭 북한 음식 같다고 했다. 고기를 거의 드시지 않는 아빠와 고기는 굽는 거 말고 요리할 줄 모르는 엄마.


깡시골에서 자란 아빠와 엄마에게 고기란 그리 자주 접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집에 소소한 잔치라도 있어야 고기를 잘게 썰어 우린 탕이라도 먹을 수 있었다.

그냥 가난했다고 해야겠다.


밭에서 난 가지와 오이, 고추를 잘게 썰어 재래식 된장에 빡빡하게 졸인 강된장, 상추와 호박잎에 고봉처럼 쌓은 보리쌀밥. 그게  아빠, 엄마의 주식이었다.

그냥 가난한 밥상이라고 해야겠다.


식성은 참 바뀌기가 어려운 지, 엄마, 아빠의 식단은 60,70대가 되어서도 여전하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이건 사찰음식보다 더하다고 해야하나.

고기가 아니라면 그나마 동물성 단백질인 계란이라도 드실법 한 데, 그것도 아니니  단촐하다 못해 가난한 밥상.

그것을 두고 신랑이 북한 음식 같다고 한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반의 반장이었던 정주가 교회 단합대회를 한다고 초대를 한 적이 있었다. 준비물은 도시락.

나는 철물점에서 늦게까지 일 하시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알루미늄 도시락통에 밥과 시금치 나물 하나를 넣어서 들고 갔다.

점심 시간이 되어 밥과 시금치가 한 몸처럼 섞여버린 내 도식락을 정주네 가족들이 보고, 정주 할머님이 당신네 도시락을 같이 먹으라고 하셨다.(정주 할머님이 혀를 좀 끌끌 찬 것 같기도 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은 지금의 내 느낌일 뿐인가.)

화려하고 갖은 종류의 음식이 담긴 정주네 도시락을 보고 나는 뭔가 내 도시락이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꼬맹이가 무슨 자존심이었는 지, 살짝 쉰내 나는 시금치 도시락을 싹싹 비우고, 땀이 뻘뻘나게 뛰어놀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 아빠의 음식 습관은 고스란히 나에게 물려졌다. 신랑이 북한 음식 같다고 한 음식을 나는 지지고, 끓이고, 볶는다. 그리고 나만 먹는다. 신랑과 아들은 젓가락이 좀체 가지 않는 모양이다.


어릴때부터 먹어온 음식이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처럼 몸에 새겨진다는 걸 나는 몸소 안다.

짜고 매운 땡초로 짜그라든 된장찌개가 산초가 범벅된 짠 김치가 짜고 맵고 칼칼한 풀치조림이 그리울 때, 그건 건강 밥상이 아니라 노동으로 찌들어 돌지 않는 입맛을 돋구기 위한 생존 밥상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리고 그 가난한 입맛이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가방을 들어도 낭중지추처럼 감춰지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내가 우리 부모님의 밥상이 어제도 그제도 애처로웠던 것 처럼, 내 아들은 커서 나의 밥상을 애잖해하지 않도록,

쫌 신식으로다가 쫌 촌스럽지 않게 쫌 잘 하는 것처럼 남한스럽게 식사를 차려본다. 최선을 다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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