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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이날 Aug 03. 2021

아빠가 죽으러 간 날

새벽  시가 다 되어도 아빠는 귀가를 하지 않았다. 아빠의 핸드폰은 하루종일 꺼져 있었다. 아빠가 죽으러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지 순례자들과 세계 여행객들이 지구를 몇 바퀴씩 돈다. 그들이 탄 차와 기차와 비행기가 몇 킬로미터를 갔는 지, 그들이 걸어서 어디까지 갔는 지, 오체투지든 여행이든, 지구를 몇 바퀴 돌았는지에 대한 제목으로 책이 나오기도 한다.


나는 지구 둘레의 몇 바퀴 만큼이나 많이 걷고 많은 탈것들을 탄 사람을 안다. 나의 아빠다.

아빠는 중학생이었던 시절부터 지게에 놋그릇을 지고 읍내의 시장에 가기 위해 산을 넘었다. 6남매 중 유일하게 공부를 잘했던 아빠는 학비를 모으기 위해 숱하게 걷고 또 걸었다.

지게를 지고 다녔기 때문인지 아빠의 키는 형제 중 가장 작았다. 그리고 지게를 맨 덕분에 아빠는 시골에서 대도시인 부산 소재 공고로 나름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가난은 아빠에게 표식처럼 빈혈을 달아주었다. 아빠는 청소년기부터 늘 빈혈을 달고 살았다. 못 먹어서이다.

나는 지게를 지고 산을 넘을 때마다 빈혈로 걸음을 멈추고 지게를 내렸을 어린 아빠를 생각해봤다.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해가 뜨고 지는 산을 넘으면서 어떤 꿈을 그렸을까.


아빠는 공고를 졸업하고 공사 현장에서 전기 설비를 했다. 결혼을 하고 세 살배기 아들과 한 살 난 딸을 두었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빈혈이 10m 높이의 공사중이던 건물에서 아빠를 밀어버렸을 때, 아빠는 아작이 난 다리 하나를 부여잡고 생을 모조리 포기하고 싶었을 지 모른다.


왼쪽 다리에 많은 철심들을 박아넣고 평생 절뚝거리는 다리를 갖게 된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나이지리아로 떠났다.   제반시설을 만드는 큰 공사에서 아빠는 노가다 같은 전기 설비일을 했다.

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빠는 수줍음이 가득한 얼굴로 토황을 머리에 인 흑인 여성들과 흰 이를 내놓고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사진을 전리품처럼 안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아빠는 전기철물점을 차렸다. 엄마가 가게를 보는 동안 아빠는 절뚝거리는 다리로 제주, 부산, 대구, 대전. 서울 찍고 시골 구석구석까지 전기공사를 하러 다녔다. 차도 없이 시외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때로는 비행기를 탔다. 이미 아빠의 행보는 지구 세  바퀴 반을 넘고도 넘쳤다.


내가12살이 되던 해. 아빠는 전기철물점을 접었다. 엄마는 작은 재봉 공장에 취직하고 아빠는 비행기를 타고 중국 칭다오로 갔다. 해태 중공업의 한 공장내 공장장으로 일을 했다.

공장에서 해고된 한 중국인이 보복성으로 공장에 불을 질렀다. 아빠는 불을 끄려다 온 몸에 화상을 입었다. 미이라처럼 붕대를 칭칭 감고 한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화상 직후 온 몸이 새까맣게 변한 사진은 대재난 같았다.


절뚝이는 다리에 화상까지 입은 아빠는 지게를 졌던 힘으로 그동안 모았던 재산을 털어 칭다오에 진출한 한국 공장 주변에 큰 식당을 차렸다.

그리고 한국에서 진출한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자 아빠의 식당도 문을 내렸다. IMF였다.

설상가상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의 오빠이자, 아빠의 하나뿐인 아들이 청사포에 놀러갔다가 파도에 휩싸여 사망했다. 아빠는 하늘이 무너져내린 듯 통곡했다.


아빠는 맨몸에 작은 옷가지 가방 하나를 들고 귀국했다. 수중에 남은 건 무전일푼인 빈 몸뚱이 하나였다.


엄마, 아빠는 매일같이 싸웠다. 아니. 생전 화 내는 법 없던 아빠가 일방적으로 엄마에게 뜯겼다. 귀에 피가 철철 날 것 같은 엄마의 앙칼진 화가 매일 아빠 귀에 꽂혔다.

나는 지금까지도 생불이 있다면 우리 아빠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아빠는 완전히 망한 것 같았다. 간간히 전기공사 일이 있어 제주에서 서울까지 오가지만, 지게를 졌던 소년이 가졌을 법한 기개가 꺾인 지는 오랜 것 같았다.

아빠는 이제 너무 늙어 있었다.


미국의 한 하버드생을 아들로 둔 재미교포가 아빠에게 공장에 들어갈 전기 자동화 시스템 일을 의뢰했다. 재미교포는 자랑스러운 하버드생 아들을 데리고 방한해서 구체적인 사업수리계획서를 내밀었다. 아빠는 착수금 조금을 받고 일을 시작했다. 빚을 내서 재료를 사고 인부를 구하고 1년을 그 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갑자기 재미교포가 모든 연락을 끊고 잠수했을 때, 아빠에게는 미국으로 날아가 법정공방을 벌일 힘도 돈도 없었다. 빚만 호주머니에 고스란히 더해졌다.


아빠는 다음날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아빠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아빠의 핸드폰은 계속 꺼져 있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우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날 새벽, 아빠가 돌아왔다. 손에 커다란 고추 한 포대를 들고 말이다.  밀양에 갔다고 했다.


훗날, 아빠는 죽으러 밀양에 갔다고 했다.

평생 차 한 대 없었으니 거기까지도 시외버스를 타고 절뚝거리며 죽을 자리를 찾아가셨겠지......


아빠는 밀양에 간 김에 마지막으로 고추 농사를 짓던 초등학교 동창을 보러 가셨단다. 그리고 간 김에 밭에 가서 하루 종일 고추 따는 일을 도우셨단다.

그리고 또 또 친구분과 술 한 잔 기울이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셨겠지. 그리고 또 당신이 가시면 큰 충격을 받을 딸의 안위를 생각하셨겠지.


아빠는 일흔 두살 노인이 되셨다. 여전히 뜨문뜨문 전기일을 하고 계신다. 아빠의 호주머니는 아빠가 걸어온 km에 비하면 하등 별 볼일이 없다.


지구를 세 바퀴 반만 돌아도 훌륭한 책이 나오는 데, 아빠는 성치 않은 다리로 지구 열 바퀴는 거뜬히 돈 것 같은 데.


아빠의 훌룡함은 절뚝거리는 다리에, 그리고 살아있음에 새겨졌다. 그 자취를 아는 딸에게만 새겨졌다.

그래서 내가 슬픈 건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내가 본 사람들 중 가장 내면이 강하신 분이다.

쓸쓸하고 초라한 자태지만 그 내면에 빛나는 따뜻함과 인자로움과 깊은 헤아림을 나는 안다.

나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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