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는 '엄궁'이다. 지명은 그 땅의 형상을 본떠 짓는 경우가 많은 데, '엄궁' 또한 마찬가지이다. '엄'자는 엄하고 험준하다. '궁'자는 활을 의미한다. 엄하고 험준한 곳에 활이 있으니 글자 그대로 아주 옛날에는 국방수비를 담당하는 곳으로 역할을 했다.
지금도 험하게 가파른 데, 그 옛날에는 오죽했을까. 나는 지금도 망루를 두기에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까끌막이 죽 이어지는 곳.
10여년 전, 이 동네에서 1군 아파트라 불리는 '롯데캐슬'이 생겨났고 그 앞으로 새로이 포장된 길을 닦았지만, 대기업도 '엄궁'의 험준함을 이기지는 못했다.
처음 이 새로난 길을 지날 때, 나는 연식이 10년 된 아반떼가 거침없이 나아가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걸 깨달았다.
50도는 기울어진 듯한 이 도로에서 겨울에는 블랙아이스로 차가 뒤집어지진 않을까, 여름에는 엔진이 과열되어서 차가 퍼져 미끄러지진 않을까. 온갖 걱정에 나는 새로난 지름길을 포기하고 좀더 둘러 내려가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다행히 이 곳은 한적한 주택가이다. 그리고 불행히 상권이 크게 조성되지 않았다. 집앞 작은 마트를 제하고, 뚜레쥬르나 파리바게트의 보송보송한 빵이라도 하나 사려면, '운동삼아'라는 마인드를 꼭 장착해야한다. 물론 올라올 때 종아리가 터질 각오도 해야한다.
아니면 버스를 타고 오가는 수가 있는 데, 식빵 하나 사자고 그런 수고를 감내할 내가 아니다.
그럴바에는 '의지의 한국인'이 되고 말지.
나는 '그럴바에' 덕분에 '의지의 한국인'이 되었다. 아니다. 식빵 하나 먹자고 '의지의 한국인'이 된 것 같다.
식빵 하나 살 바엔 내가 만들어보자 싶었다. 오븐은 없지만 나에겐 1세대 에어프라이어가 있으니까.
유트브 선생님의 친절하고 고마운 무료강의 덕분에 나의 식빵은 딸기잼과 버터계의 에르메스라는 라꽁비에트와 포개져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됐다.
에어프라이어의 특성상 열이 고루 돌지 않아 아랫부분이 익지 않는다거나, 180도 이상 올라가지 않는 열기로 빵이 허옇게만 익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정도는 빵을 사러가는 수고로움을 이겨내고 버텨낼 수 있었다.
나는 식빵에서 시작해 식빵 반죽으로 소시지빵을 만들고 소시지낙엽빵을 만들고 햄버거빵, 흑설탕시나몬빵, 통밀견과빵, 단팥빵을 만들었다. 반죽을 변형해 베이글을 만들고 피자도 굽고 복숭아파이, 호두파이, 파운드케이크도 구웠다. 한 달 만에 모양이 50% 이상, 맛이 30% 이상 부족한, 그래서 집빵 같은 빵을 굽고 또 굽게 되었다.
그리고 더 많은 종류의 빵을 구워보고 싶어 저가의 오븐을 하나 들이고, 무게와 빵 성형 후의 발효 크기를 가늠 못해 얼굴 크기만한 단팥빵을 만들었던 과오를 다시는 범하지 않도록 전자저울을 샀다.
나의 저가 오븐이 저가 오븐답게 최고 온도를 220도 밖에 찍지 못하지만, 내 실력도 하수이니 '우리 같이 잘해보자!', 으쌰으쌰거리며 오늘도 애기궁뎅이 같이 보송보송한 반죽을 치대어본다.
물론 내 아버지를 위해 얼굴 크기만한 단팥빵을 만들어 의기양양하게 친정을 방문했을 때, "이건 다시 구워오지 마라" 팩폭했던 엄마 말씀은 안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