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해결 과제 - 나의, 혹은 우리의 한 때
한국에서의 시간은 바쁘게 흘렀다. 너와는 교내 아르바이트 시간대가 겹쳐 종종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한가한 너의 근무지에 가끔 다른 친구와 함께 놀러 가 공강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아르바이트 시간대가 겹치던 또 다른 친구와 셋이 함께 식사를 하는 날 보다 너와 둘이서만 식사를 하는 날이 조금 더 즐겁기는 했지만 그런 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지는 못했다. 다 똑같은 친구지 뭐. 하루는 자기 손이 엄청 차갑다며 손을 잡아보라는 너의 말을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오늘 예쁘다고, 어디 약속 있냐는 말도 괜히 틱틱거리며 넘겼다. 남자친구와 잘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과, 그러면서도 남자친구와 사이가 위태로울 때마다 장난인 듯 진심인 듯 웃으며 자기라면 그러지 않을 거라 하던 말 중 뭐가 더 너의 진심에 가까운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묻지 않았다. 나한테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는 그냥 여기저기 친절한 사람, 귀엽다는 말이 입에 붙은 사람이어야 했다. 안 그러면 내가 흔들리니까.
가족에 관해 마음이 힘든 날에 남자친구보다 더 기대 울고 싶었던 사람은 너였다. 남자친구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겪어보지 않은 일을 이해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동생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조카라곤 없는 나에게 ‘조카 선물이야? 귀엽네.’라고 말했을 때 마음 한 조각이 부서져 흘렀다. 너는 이해할 텐데. 이 마음도 그저 비장애형제간의 유대감이라고만 생각했다. 이성적 호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을 내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첫 번째, 지금의 남자친구에게 나쁜 년이 되기 싫어서. 두 번째, 너를 그저 그런 전 썸남, 혹은 전 남자친구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착한 사람이고 싶었는데, 나는 그냥 비겁한 사람이었구나.
또 시간은 흘러,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4년. 할 만큼 했다 싶은 마음에, 우리에게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루어진 평범한 이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4년이라는 시간은 제법 차곡차곡 쌓여 있어서 헤어지고 한 동안은 밤산책이 잦았다. 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이던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마음을 돌보는 방법이었다. 밤 산책 풍경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거의 항상 너의 답장이 있었다. 대체로 ‘어 여기 거기네’ 하는 시답잖은 내용이었다.
- 어 여기 거기네
ㅇㅇ
아 그리고 나 헤어짐.
- ?
- ㅋㅋㅋㅋㅋㅋㅋ진심? 갑자기?
웃지 마
- 나 운동하고 들어가는 길이라 너 산책길 근처인데 잠깐 볼래? 땀냄새는 좀 나겠지만….
상관없어. 근처면 그러든가
왜 헤어졌는지, 요즘의 마음은 어떤지, 우리는 함께 걸으며 얘기를 나눴다. 너는 내내 깔깔 웃으며 자기가 누군가의 남자친구였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그 웃음을, 그 말을 해석하기가 나에게는 어려웠다. 산책은 우리 집 앞에서 끝났다. 나의 이별이 우리 관계에 변화를 가져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너는 여전히 친구였다. 싱거운 장난꾸러기 같으면서도 중요할 때 중요한 위로를 건네는 친구였다. 이별과 고시 공부에, 머리 아픈 가족 문제에 맞닥뜨릴 때면 너는 내게 꼭 필요한 위안의 말을 가져왔다. 가끔 너의 행동에 대해 친구 이상인 건가 싶은 물음표가 뜬 적도 있었지만 확신을 가지기는 어려웠다. 너의 마음을 모르겠는 것과 별개로 스스로 너를 향한 마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부정하는 게 나에게는 이미 습관이 되어 있었다. 너는 그냥 좋은 친구지. 누구에게나 친절한 친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