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환갑을 맞아 가족여행을 계획했다. 항공권 예약, 숙소 예약, 동선 계획 및 입장권 예약 등 대부분의 계획을 내가 맡아 3대 6인 가족여행의 기획자로서 책임이 막중했다. 연차 일정을 공유하며 가족여행 계획이 쉽지 않다고 토로하자 직장동료가 물었다.
"그거 다 혜은 씨가 하면, 언니는 뭐해요?"
다른 분들도 자연스럽게 말을 얹었다.
"그러게, 보통은 장녀가 하던데 그런 일들을."
사람들은 구멍 난 자리를 기막히게 눈치챈다. 나는 구멍인 줄도 몰랐던 자리인데. 예전부터 장녀 같다는 얘기를 흔하게 들었다. 전에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착잡했다. 정신연령으로 따지자면(...) 실질적인 장녀이니 다들 보는 눈이 참 정확도 하다 싶어서다. 내가 나도 모르게 언니의 존재를 지우고 있나, 스스로 검열하게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익숙한 역할에 상대방을 넣어보는 습관이 있음을, 자라면서 내게 학습된 역할이 동생의 것이 아니기에 나를 장녀로 보는 것이 내가 언니의 존재를 어떻게 느끼는지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러움을 지금은 이해한다. '언니가 있어요'를 티 내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동생 역할을 할 수는 없지 않나. 구멍인 줄도 몰랐던 자리를 메꿀 수는 없다. 그리고, 설령 내가 언니의 존재를 지웠다고 해도 나를 탓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은 자랐다.
- "하하 저희 언니는 공주님이라서, 별 거 안 해요"
사실도 거짓도 아닌 모호한 말로 넘어간다. 이런 식으로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회피하는 것은 실패하면 곤란해지고, 성공해도 자괴감이 드는 고-급 사회적 스킬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할까?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언니에게 성당에서 떠나는 해외 성지순례를 경험시켜주고 싶은데 엄마가 일정이 어려우니, 혹시 혜은이 네가 언니와 같이 다녀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생각해 보겠다고 답은 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패키지여행이긴 하다지만, 언니와 해외라. 국내에서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많은데 언어도 통하지 않는 해외에서는 갓난쟁이 아기 보듯 언니를 신경 써야 할게 분명했다. 하지만 해당 국가는 나도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했고, 엄마가 일정이 안 맞는 걸 너무 아쉬워하면서 꺼낸 부탁이기에 선뜻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며칠을 고민하다가 같이 밥을 먹던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엄마가 언니 데리고 여행을 가라는데, 너무 부담스러워서 요즘 마음이 무겁다."
- "언니랑 여행 가는 게 왜 그렇게까지 부담스러워? 언니가 해외여행이 처음이셔?"
아, 다른 사람들에게는 언니와 해외여행을 가는 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구나. 나의 고민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이해시키려면 언니의 지적장애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는 거구나. 그때 알았다. 비장애인 자매의 여행은 '언니랑', '언니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언니를 '데리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고-급 사회적 스킬을 연마하기 전이어서 친구에게는 모두 사실대로 말했다. 생각지 못하게 들켜버린 작은 구멍에 속수무책으로 나를 열어 보여야 했다.
또 어디에 나는 모르는 구멍이 있을지가 궁금하다. 궁금... 한가? 모르는 것을 궁금해하는 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자동완성처럼 써낸 문장인데, 생각해 보니 딱히 알고 싶지도 않다.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어떠한 정상성에 대해 아는 것은 나를 조금은 더 능숙하게 만들겠지만 더 떳떳하고 더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 같다. 언니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회피하는 고-급 사회적 스킬 발휘 후에는 언제나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나는 그냥 조금만 더 대비하고 싶다. 모르는 구멍에 발을 헛디뎌 쫄딱 젖어버리는 게 아니라 원할 때 원하는 만큼만 나를 드러내고 싶다. 언젠가 놀람도 동정도 의문도 혐오도 사지 않고 찬찬히 언니와 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