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이 또 지나갔네요

by 은혜은

2025년의 마지막 날, 연나이 20대의 마지막 날. 뭔가 대단한 감상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야근하고 라면 먹고 11시쯤부터 쿨쿨 잤다. 전에도 그리 복잡한 생각을 하며 살진 않았으나 요즈음엔 더더욱 단순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 이 단순한 행복이 싫지는 않지만 조금 더 선명하고 멋진 서른 살이 되고 싶기도 하다. 다들 2025년의 아쉬움은 보내주고, 좋았던 기억은 잘 보관해 두면서 2026년을 새롭고 건강하게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연초의 바짝 긴장했던 신입 시절을 뒤로하고 어느덧 일 년을 채웠다. 평범하게 지겨워하고 일상적으로 짜증스러워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이 권태와 무감각과 짜증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감사히 생각하려고 한다. 이전의 불안과 동요를 떠올리면 권태로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른다.


1월에 친구들이랑 우르르 신년사주를 보러 갔었는데, 거기서 옮긴 직장이 잘 맞을 거라고 했었다. 사주팔자가 잘 맞은 덕분인지 그냥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의 생활이 나쁘지 않다. 올해도 신년맞이 운세를 점쳐볼까 하다가 알아보는 것도 예약하는 것도 귀찮아서 관뒀다. 이 얘기를 하니 누군가 '그건 살만해서 그래~ 남의 입을 통해서 미래를 듣지 않아도 평화로운 상태인거지'라고 했다. 동의한다. 살만하다!


이사도 올 해의 큰 이슈였다.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까 일주일을 달달 떨고 이것저것 알아보며 울었었는데, 무사히 이사를 했고 지금의 주거환경이 아주 만족스럽다. 날이 좋을 때에 한강공원을 자주 걸었다. 생일 - 이사 - 최애 가수의 전역이 연달아 있던 뜨수운 5월이었다.



여름


애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 고민들이 있었는데 (이런 초딩같고 무딘 남자.. 괜찮을까... 등) 지금은 그냥 편안하고 함께 있으면 즐겁다는 생각이 가장 크다. 같이 떠난 첫 해외여행, 우산으로도 소용없는 장대비가 내리는 와중에 짐을 양손에 잔뜩 들고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는 절망적인 상황에도 짜증 내봐야 소용없다며 웃는 모습이 고맙고 좋았다.


아빠가 미루고 미루던 허리 수술을 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더니 입원이 생각보다 길어서 급히 병문안을 다녀왔다. 배드민턴, 테니스, 골프... 온갖 편측운동을 좋아하던 아빠가 최소 3년은 그중 아무것도 못 하게 되어서 중장년 우울증 오는 건 아닐지 내심 걱정했는데 당구도 치고 농사도 짓고 알아서 새로운 취미를 잘 찾은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부모님이 나이 들어가는 게 훅 느껴진다. 효도해야지 해야지 하는데 실제로는 전화도 잘 안 한다. 이 노답 딸 어쩌지.......



가을


책과 글을 가까이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몇 자 쓰지 않은 글 중 한 편이 '브런치 작가의 꿈' 100편의 글 중 하나에 선정되어 내 글이 전시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누군가 정말로 내 글을 읽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건 짜릿한 일이었다. 그 후로 더 열심히 글을 쓰자고 다짐했었는데 처음 쓰는 게 이거다. 조금 더 많이 읽고 많이 쓰는, 내 마음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2026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올 하반기에는 친구들의 좋은 소식이 유독 많았다.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지겠지. 모든 결혼식이 뜻깊지만, 특히 수면바지 입고 닭가슴살 굽던 그의 턱시도 입은 모습을 보니 만리타국에서 천방지축으로 여행하던 교환학생 친구들 모두가 점점 어른이 되고 각자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구나 싶어서 감회가 남달랐다. 앞으로의 인생을 함께 헤쳐나갈 짝꿍을 결정하는 친구들의 용기에 박수와 축복을 전한다.



겨울


봄, 여름, 가을을 지나 어느덧 12월.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성당에 갔다.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 속에 들어앉으니 25년도에 맞이한 두 사람과의 이별이 떠올랐다. 사실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는데, 누군가 차라리 죽음이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고통 속에 있는 동안 아무도 닫지 못했다는 게 많이 안타까웠다. 남은 사람들의 모습이 슬펐고, 조직의 대처에 화가 나기도 했다. 2년 반 동안 죽음에 대해 듣던 때에는 겪지 않았던 것을 '아무도 나에게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 곳에 와서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겪게 된 것이, 삶이 참 알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으로선 그저 떠난 분이 평안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밑천을 드러낼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