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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은 Nov 13. 2022

살구를 먹는 여름

    지하철 스크린도어에서 발견한 시 한 편


<옷이 자랐다> - 최순향

구순의 오라버니
옷이 자꾸 자랐다

기장도 길어지고
품도 점점 헐렁하고

마침내
옷 속에 숨으셨다
살구꽃이 곱던 날에


    퇴근길 지하철에서 별안간 눈물 참기 챌린지... 원래도 눈물이 많은 사람이긴 했지만 요즘은 좀 심한 것 같아.. 하필 마지막 단어가 '살구꽃'이라 작년에 살구를 먹었던 때가, 그때 적어두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발랄한 시가 귀한 이유는

시라는 건 대개

살구를 가르다가 별안간 눈물을 흘리는

살구가 안쪽부터 썩는다는 걸 발견하는

그런 순간들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예전에 어딘가에서 '체리를 먹을 여름은 내 인생에 100번도 남지 않았다'는 문장을 본 이후 제철과일을 챙겨 먹는 것은 인생의 큰 과제와 즐거움이 되었다. 과일이란 게 자취생이 챙겨 먹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품목이었지만, 어쩔 건가 나에게는 체리를 먹을 여름이 100번도 안 남았는데.


    저 문장을 쓴 분에게는 체리였던 것이 나에게는 살구가 되었다. 살구는 참 별 맛이 안 나는데 맛있다. 은근히 발견하기 어렵고 출하되는 기간이 짧다는 게 살구의 매력 포인트다. 마트나 시장 가판대에서 살구를 발견하면 슬슬 여름이 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한 바구니를 집어온다.


    작년에도 그런 마음이었다. 고시생이자 자취생에게 살구 한 바구니는 햄버거 세트 하나를 든든하게 먹을 금액이었지만, 나는 살구를 사야만 했다. 이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 과정에서 먹고 싶은 제철과일 하나 못 먹는다면 그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내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고 해서 이런 작은 행복까지 유예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서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지금-여기서도 행복하겠다며 비장하게 집어온 살구 한 바구니. 그냥도 먹고 요거트에 넣어서도 먹고 크림치즈를 발라서도 먹었다. 냠. 한 바구니를 한 번에 다 먹지는 못해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정신없이 며칠이 지나고, 잊고 있던 살구를 얼른 먹어야겠다 생각했는데 냉장고의 살구는 예상보다 멀쩡해 보였다. 며칠 더 두어도 되겠다 싶었다.


    또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살구를 꺼내고 씻어서 가르자 다 썩어버린 속이 드러났다. 그게 뭐라고 너무 슬펐다. 겉으로 괜찮아 보인다고 속이 썩는 동안 모르고 방치했구나. 안 보이는 곳부터 곪아 들어가는구나. 나 같네. 미안해라.




    살구를 버리면서 울던 여름을 지나서, 올해 여름에도 살구를 먹었다. 고시생 신분은 벗어났지만 여전히 자취생이라 과일을 먹기에는 약간의 의지가 필요하다. 세상에는 과일보다 더 저렴하고 더 필요한 음식이 많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괜찮은 척했지만 불안으로 상해가던 작년의 마음은 다 아물었는지, 갈라 보기 전에는 알 길이 없다. 그저 나에게 아직 과일을 사 먹을 만큼의 행복에 대한 의지가 남아있음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겨울이 온다. 겨울에는 귤을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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