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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은 Feb 06. 2023

저녁식사

안 우는 아이한테도 떡을 좀 줘

    웬일로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 뭐 해?

    - 나 오늘 출근했는데, 무슨 일 있어?

    동생 이삿짐 올려주고 아빠는 일정 있어서 먼저 내려가는 길이다. 엄마는 남아서 정리 더 해주고 기차 타고 온다네. 요즘 엄마가 많이 피곤해한다. 저녁 맛있는 거 같이 좀 먹어라.


    저녁에 만나기로 한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안 피곤하고 내 시간은 비어 있는 줄 아는 아빠의 말에 은근한 짜증이 밀려왔지만, 오늘이 이사 날인 건 알고 있었고 아빠가 이런 말을 하는 날도 흔치 않으니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해보기로 결정했다.


    동생에게 이사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기 위해 전화를 했다. 엄마와 점심을 먹으러 가고 있다고 했다. 


    어디로? 

    - 명동. 거기 짜장면 맛집이 있어서. 먹고 다시 집 가서 정리하려고. 

    뭐? 명동? 하…. 알겠다. 저녁에 정리 끝나면 연락해.


    전화를 끊자 화가 부글부글 났다. 동생이 구한 방부터 명동까지는 대중교통으로 4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멀리서 서울까지 올라온 피곤한 엄마를, 짜장면을 먹자고 명동까지 데려가? 쟤는 왜 저렇게 센스가 없어? 미친 거 아냐?


    퇴근해서 집으로 가는 길, 할머니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엄마 서울에 있는 거 아니, 오늘 시간 있니, 엄마가 요즘 많이 피곤하다, 저녁은 어떻게 할 거니…….' 할머니의 쏟아지는 질문들에 건성으로 대답하는 동안 누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이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물리적인 아픔이었다.


    동생에게 짐 정리 끝나면 서울역으로 오라는 연락을 남겨두고 ‘서울역 부모님 맛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오늘 만나지 못하게 된 친구들에게 사과를 했다. 갑자기 엄마가 올라오셨다고, 그런데 동생의 점심식사 식당 선정을 보니 저녁식사까지 믿고 맡길 수가 없다고. 미안하지만 다음에 보자고. 이 모든 과정이 나한테는 거대한 스트레스였고, 오랜만에 보기로 했던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컸다. 


    어찌어찌 서울역에서 엄마와 동생을 만나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엄마의 기차 시간까지는 50분 정도가 남아있었는데, 엄마가 동생에게 ‘너는 피곤할 테니 먼저 가라, 엄마는 누나랑 있다가 가면 돼’하고 말했다. 원래도 엄마 기차 시간까지 당연히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상했다. 얘는 이사했다지만 나도 나름대로 출근하고 왔는데,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데. 나는 안 피곤한가.


    엄마를 배웅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 낮부터 눌러뒀던 자잘한 스트레스들이 한 번에 올라왔는지 버스에서 왈칵 눈물이 났다. 왜 나의 애씀은 이렇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느낌이지. 나는 엄청 스트레스받고 굉장히 애써서 해내는 일이었는데. 아빠 엄마 할머니 동생 다 왜 당연한 듯 쉽게 생각하는 것 같지. 내가 힘들다는 얘기를 안 해서?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데 나는 울지 않는 아이여서? 근데 나는 왠지 가족들 앞에서는 울기가 싫은 걸.


    사실 엄마는 명동의 짜장면도 맛있게 먹었을 텐데. 내가 그냥 선약이 있다고 했으면 엄마는 굳이 굳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 나 혼자 신경 쓰고, 내가 하겠다고 한 거면서 왜 이렇게 스트레스받아하지 나는. 짜잔-하고 나타나서 맛있는 저녁을 대접하는 멋진 딸이 하고 싶었던 걸까. 그랬다면 그건 내 욕심이었던 건데 왜 다른 사람들한테 서운해할까. 내 안의 뒤틀린 인정욕구 때문일까? 근데 노력한 부분을 인정받고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게 그렇게까지 뒤틀린 심사는 아니지 않나. 


    순간 애인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없으니 떠올려진 사람은 전애인이겠다. 여러 얼굴이 겹쳤다. 명확히 떠오르는 하나의 얼굴이 없었다.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나를 좀 안아줬으면(이영훈, '일종의 고백' 가사 中). 그냥 아무나 붙잡아 안고 오늘 너무 힘든 하루였다고 울다가 팔베개를 하고 잠들고 싶었다. 눈물을 닦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가끔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건강하지 못한 외로움이 찾아올 때면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별로 없다. 혼자 술 마시고 걷고 울다가 잔다. 


    쓰고 보니 내가 성인 상담을 안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인 내담자에게 절주 하시라고 말할 낯이 없으니. 혜은 씨. 마음이 힘들 때 술 마시지 마시고요. 악순환인 거 아시잖아요. 내일 출근도 하셔야 하시는 분이. 술 줄이고 운동 좀 합시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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