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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혜 Eunhye Jeong Aug 26. 2020

어린 나를 읽은 한 잉여의 날에

어제로 예정했던 출국을 열흘 정도 미루면서 준격리 상태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잉여의 날들. 중요한 일은 코로나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되기 이전에 아슬아슬하게 마친 상태고, 잡혀있던 약속, 잡고 싶었던 약속은 모두 취소했다. 사흘 정도는 즐거운 휴식이었지만 나흘째가 넘어가니 멍하게 방바닥만 긁게 되었다. 그래서 한 일이 엄마가 모아둔 유년기의 일기장 읽는 것이었다.


한국 나이 6살부터의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 쓴 일기장까지 있었다. 5학년 때의 일기장에서는 초경을 한 내용과 사춘기의 예민함과 우울함으로 꽉 채워진 일기가 눈에 띄었다. 엄마 잔소리, 아빠 잔소리가 지나치게 서럽게 느껴지던 때였다. 지금의 글씨체와 똑같은 점도 인상적이었다.


그때만 해도 성교육이 그렇게 건강하진 못했던 것 같다. 드라이하게 생물학적 내용을 설명하는 비디오와 여자 아이들에게 겁을 주는 내용이 전부였던 것을 기억한다. 일기에 보니, “어떤 중학생이 성폭행을 당해서 임신한 후에 아이를 화장실에서 낳고 창밖으로 던져버렸다는 비디오를 봤다. 경찰들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다. 조심해야겠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지금 보니, 결국엔 여자가 몸조심해야 한다는 것, 또 그 정도로 자극적인 소재를 초등학생 성교육 소재로 사용한 것이 어이가 없다. 같은 일기장에는 학급 내 집단 괴롭힘의 일화도 적혀있다. 무시무시한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던 나이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일기장은 여러모로 재미있었다. 별로 쓸 거리가 없거나 억지로 써야 했는지 별 내용도 없고 싱겁기만 한 글도 많이 보였다. 당시 일인용 소파에 앉아 집에 있던 위인전과 각종 동화책을 즐겨 읽던 생각이 난다. 12월, 아마도 세종대왕에 관한 책을 읽었던 날인가 보다. 한글날도 아닌데 세종대왕님께 편지를 쓰기도 했다. “세종대왕님께, 세종대왕님 안녕하세요? 글씨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다음이 허를 찔러 한참을 웃었다. “나도 위인이 되면 어떨까요? 기분이 좋겠죠.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은혜 올림” 세종대왕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또 다른 싱거운 일기는 같은 달 쓴 “책”이라는 짧은 일기다. “난 책 없이 살 수 없다. 재미있는 동화와 위인전기 책을 그냥 놔두면…” 그다음이 재미나다. “책만 많이 있는 집이 될 것이다.”


이때로부터 일주일 전 즈음에 쓴 일기는, “귀가 이상해졌다.”라며 몸 걱정을 하는 내용이었다. 나의 요즘 일기장을 봐도 몸 상태를 적어놓은 것이 40프로는 될 것 같다. 오늘은 잠을 잘 못 잤고 어제 먹은 음식이 소화가 안되었다는 둥, 컨디션 관련 비슷한 이야기가 꽤 많다. 나의 어린이 시절에도 이런 일기를 썼단 것을 알고 실소를 했다.


엉뚱하고도 기특한 글들 사이에서 초1 솜씨 치고는 수작이라고 할만한 일기도 발견했다. 그 날 하루에 겪은 두 가지의 경험이 하나의 심상으로 연결되어 자연의 회복을 바라는 예쁜 마음이 표현되어있다. 나름 3 문단으로 — 거의 한 문장이 한 문단이지만 — 이루어진 장문이다.


“더러운 개천

교회에서 집에 오다가 더러운 개천을 봤더니, 아름다운 강이 되어 반짝반짝 빛이 나고 찬란하게 흐르고 있었다.

오후에, 엄마가 색종이로 예쁘게 별을 만들어 주셨다. 반짝이는 별을 보니 강물이 아름답게 변한 것이 생각났다.

더러운 개천이 햇볕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강처럼 보였는데, 진짜로 그렇게 되면 참 좋겠다.”


마지막으로 7살 때 쓴 동시를 소개한다.


“나뭇잎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떼구루루 굴러다니고/솔바람이 솔솔 불면 나뭇잎이 살랑살랑 떨어집니다/날갯짓을 하여 날아다니며 떼구루루 굴러 뛰어갑니다/다람쥐처럼 재주넘기 참 잘합니다/빵꾸 난 나뭇잎 멋 부린 나뭇잎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 동시를 쓴 날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을 한다. 유치원을 마치고 하원을 하여 집에 왔는데 벨을 눌러도 답이 없었다. 아파트 한 구석에 있는 등나무 쉼터에 앉았다가 다시 아파트 입구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그날따라 바람이 선선하고 날도 금방 어둑해졌다. 혼자 쓸쓸하게 앉아있는데 만화에서나 보던 회오리 모양 바람을 타고 나뭇잎들이 정말 다람쥐처럼 굴러갔다. 그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졌는지, 홀로 있는 자신이 처량했는지, 이심전심이 되어 훌쩍거리며 이 동시를 썼다. 생애 처음으로 느낀 멜랑콜리한 감정이었다. 그때의 기분을 탔던 것이 생생한데 의외로 동시가 담담한 것이 인상적이다.


지나간 세월이 꾹꾹 눌러쓴 일기로 남아 오늘에서야 되돌아본 감회가 남다르다. 생각보다 더 곱씹어보게 되었다. 내가 나이기에 더 잘 아는 것들, 글씨체, 문투에서 느껴지는 세밀한 마음의 변화들도 볼만했다. 어른이 된 지금, 어린 나의 그날 그때에 해주고 싶은 말이 마음속에 한가득 차올랐다. 성인이 되어 나 스스로 채워나가기 이전엔 채울 수 없던 갈망들에 대해서,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친절한 선배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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