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미학과 동양 서화의 이상점을 근거로 하다
전통예술에서 추구해온 가치를 지향점 삼아 나의 창작 방식(연주, 작곡, 연습 모두 창작에 속한다)을 제련해왔다. 이는 나의 삶 자체와 태도를 재구성하는 일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내게 적용되어온 사회적 규범 social norm은 단순히 나의 개인의 것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고 자란 문화적 전통과도 대치되었다.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전통의 가치가 타문화에서 유입된 가치로 거의 대체되었기에, 내가 태어난 시대의 장에서 전통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그 껍데기는 흩어져 있고 그 정신은 어디에선가 명맥을 유지했겠지만 지극히 평범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내가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과거 일제를 비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시대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아직도 살아있는 더 큰 제국주의적인 문화의 헤게모니와 세계관*을 그대로 내면화하여 살아가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임 또한 무시할 수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인 음악가로서 전통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그 정신을 나의 예술과 삶을 통과하여 꽃 피우는 일은 탈식민주의적 운동에 참여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서로 다른 문화적 영향을 융합(fusion)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더욱더 깊은 본질이 유기적인 나를 통해 개성적인 모양을 갖추어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예컨대 전통 미술은 오로지 화선지 위에 먹으로 기운생동한 형상을 탄생시키고, 판소리는 북장단 이외에는 반주 없이 꽉 찬 소리만으로 인생 고락의 이야기의 정경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판소리에서는 통성을 강조한다. 내용에 관계없는 불필요한 꾸밈을 걷어내고, 먼저는 천지와 사람의 마음을 모두 울릴 만큼 꽉 찬 목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판소리가 다양한 색色으로 즐거운 자극을 선사하는 유흥의 성격의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판소리는 본질적인 에너지, 즉 의미와 감정이 조화를 이루는 꽉 찬 소리 그 자체를 통해 민중의 목을 대신하여 그들의 삶의 고단함에 응어리진 마음을 풀 수 있는 음악인 것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존재의 깊은 그곳을 울리는 데에 걸맞은 더 깊고 더 큰 발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 동양 서화 전통에서는 기운생동이 가득한 서화를 이상적으로 여겼다고 한다. 정신과 신체, 또는 정기신精氣神이 합일되어 나오는 힘과 운치가 작품에서 생기롭게 운동하는 그런 경지를 추구했던 것이다. 추사의 글씨에 대해 오늘날의 감상자들이 "마치 불과 어제 쓴 글씨가 먹도 마르지 않은 것 같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다양한 표현형태로 변주를 한 그의 예술세계 전반에 걸친 본질은 바로 각 작품이 머금어 뿜어내는 바로 기운생동인 것이다. 여백에도 기운이 생동한다. 무엇보다 태동하는 기운이 가득 차 있다. 여백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아니라, 운이, 기운이, 음악으로 말하자면 소리가 돌아 굽이치는 곳이다.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지 않아 남은 것이 아닌 "그려낸" 여백으로 표현하는 데에 전통의 멋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화선지는 단지 채워야 할 빈 배경 공간이 아니다. 화선지의 하얀 여백은 검은 먹과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그 상호적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서구 예술가들이 고요한, 명상적인 분위기의 선불교에 매료되어 이에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했었는데, 이로부터 오늘날에는 예술 미학적 미니멀리즘을 벗어나 유행하는 라이프스타일로까지 그 모습을 바꿔 이어오고 있다. 그들은 그 빈 공간을 고요함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고, 음과 양을 분리된 서로 다른 에너지로 이해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음과 양은 에너지의 경향과 방향에 의해 드러난 성질일 뿐 에너지의 본질을 음과 양으로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음양은 역학관계 속의 위치와 방향성을 뜻하는 것이다. 음이 없이는 양이 없다. 노자는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안으며 음양 두 기운이 융합해 조화를 이룬다 萬物負陰而抱陽"라고 했다. 음이 끌어당겨 양을 품음으로써 음양조화를 이뤄나가는 것이다. 경지에 이른 음악가는 소리가 나와 "있는" 상태뿐만 아니라 호흡하거나 소리가 드러나와 있지 않는 음악적 순간 "쉼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음과 양의 관계와 같이, 고수와 소리꾼의 관계는 음악의 배경을 만들어주는 반주자와 음악의 주요 형상을 그려내는 가수의 관계라고 보기 어렵다. 고수는 소리꾼의 소리를 적극적으로 밀고 당기는 음양의 상호적 역학관계에서 그 역할을 한다. 무대 배경과 같은 장치가 아니라 주인공과 합을 이루는 상대 배우와 같은 것이다.
어떤 물리적 형태를 띠며 나타나는 문화예술은 그 바탕이 되는 인식체계, 세계관, 철학에 의거하여 그런 구조를 띄게 되어있다. 반대로 특정 구조의 문화예술은 그것을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향유하는 모든 사람들의 의식에 영향을 준다. 이 세계는 또한 정치적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고, 가치롭다 여겨지는 문화예술 또한 그 권력구조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첨예하게 인식하며 문화적 행동을 의식적으로 결정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탈식민주의라는 프레임으로 나의 예술적 방향성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나의 시도를 역사적 프레임 안에 갇히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나의 음악세계가 놓여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식민주의의 반대적인 개념에 예속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열강에 억압을 받던 우리의 경험 이전에 이미 그 저변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던 깊이 있는 우주적 사고와 철학을 포용하고자 한다. 우리 본연의 지성적 구조를 회복하고 그 문명의 바탕을 다시 마땅한 위치에 세워 우리의 자산을 적극적으로 삼고자 한다.
*탈식민지화에 대한 논의는 미국에서는 현대 클래식 음악과 관련된 영역의 음악을 넓게 아우르는 '뉴뮤직' 분야에서 현재 끊임없이 끈질기게 문제제기되고 논의되고 있다. 식민/제국주의와 인종차별주의가 그 맥을 같이하여 작동하기 때문에 한국에 비해 미국에서는 더욱 첨예하게 현실적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참고: "New Music Decolonization in Eight Difficult Steps 뉴뮤직 탈식민지화를 향한 여덟 개의 어려운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