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봤자 음악, 그래도 음악

노처녀 성장소설

by 유니스 황

비가 왔다. 바람도 불었다. 그리하여 술 한잔 마시고 터덜터덜 동네를 걷고 있는 주말의 늦은 밤. 대로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아슬아슬한 신호에 걸렸다. 생각보다 조금 긴듯한 시간을 기다려 드디어 바뀐 불빛을 만났다.

‘파란불이다~’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옆에서 튕기듯 튀어나가는 남자.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작은 크로스백을 옆에 맨 체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그는 아마도 대리기사인 것 같았다. 많은 것들이 조금은 느려진 새벽임에도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길을 건너는데 그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우리의 세로행을 가로로 가르며 광란의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분명 그쪽은 빨간 불이었음에도...

야식 배달 오토바이다. 역시 배달의 민족답게 날쌔구나 싶었다.


대리기사도 배달 오토바이도 기다리는 사람, 원하는 고객이 있어 그들에게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특별히 찾는 사람도, 목 빠지게 원하는 사람도 없어 느릿느릿 걷고 있던 난, 그 횡단보도에서 문득 쓸쓸해졌다. 조금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 순간엔 아무도 기다려주는 이 없는 예술가가 제일 불쌍한 게 아닐까 싶어서...


“요즘 누가 씨디를 들어~,유튜브로 들으면 되는데 누가 돈 주고 음악을 들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심지어 창작을 한다는 작가들조차 “요즘 누가 영화를 돈 주고 봐요~”라는 말을 하며 불법 다운로드 사이트를 자랑스럽게 공유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여준다. 그러다가도 자신들의 작품이 나오는 시즌엔 남들이 자신의 책을 안 산다고 음악을 안 듣는다고 투덜거리는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어 허탈해질 때가 적지 않다.


자신의 기대만큼 잘 할 것도 없는 정당이나 정치가에게는 받는 것 없이도 정치 후원금을 툭툭 보내 주는 반면,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정말 팬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몇백 원 하는 음원 사는 것조차 불편해하며 열심히 공짜 음원만 고집하는 사람들도 내 주변에 많다.


그래, 문화예술이라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정치도 아니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도 아니다. 당장 먹고살 것도 없는데 충분히 공짜로 구할 수 있는 것들에는 돈을 쓰고 싶지 않은, 그리 많은 관심을 줄 수도 없는, 그 마음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무수한 예술가들이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포기해야 하는 선택을 함으로 불이익을 받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일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품고 있는 화초도 물주는 이가 아무도 없으면 결국 말라죽고 만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린 다양한 꽃을 보길 바라면서도 '누군가 주겠지' 하는 생각만 하며 스스로 움직이기는 귀찮아하고 있다.


새로운 시도를 해보겠다며 재미 삼아 트로트 편곡 앨범을 낸 지 1년, 3집 정규 앨범을 낸 지 정확히 4년이 지난 지금. 난 또 기약이 없는 새 앨범에 대해 홀로 구상하며 생각의 조각들을 조금씩 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그리 잘 팔리지 않았던 물건을, 심지어 신상이어도 잘 팔릴지 알 수 없는 물건을 또다시 만들어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팔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번엔 어쩌면...'이라는 흐릿한 희망을 품고, 내 음악을 감동적으로 들었던 누군가가 가끔씩 전하는 간증들을 발판 삼아 또다시 힘을 내보려는 중이다.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절망과 슬픔에 빠진 누군가의 작은 피난처를 만들어주기 위해, 쉴틈 없는 누군가의 작은 휴식을 위해, 식어 버린 누군가의 마음에 따스함을 전하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해 보려 한다.


드라마 미생에는 “그래 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이라는 조치훈 9단의 말이 인용되어 나온다.

나에게도 그러하다. 누군가에겐 “그래 봤자 음악”이겠지만 나에겐 “그래도 음악”이기에 다시 해볼 수밖에 없다. 나의 음악을 통해 “그래도 역시 음악”이라는 말이 조금 더 수긍되길 바라며 오늘도 희망 한 줄기 마음 밭에 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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