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다

노처녀 성장소설

by 유니스 황

급히 나가는 길이었다. 잘못하면 점심시간에 걸려 괜히 차도 막히고, 스튜디오까지 한 번에 가는 차를 놓치면 약속도 늦게 되고, 더군다나 다음 차가 올 때까지 최소 20분은 넘게 기다려야 하니 더욱 서둘러야 했다.

문득 길가의 공중전화와 그 안의 사람이 눈에 띄었다. ‘요즘도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는 사람이 있네’라는 생각을 하며 빠르게 지나치는데 그분의 등 뒤에 붙어 있는 글귀가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다.


“이 사람을 보신 분은 010.***.****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마라톤 등번호 표 보다 조금 큰 듯한 판에 쓰여있는 문장이 조금 크다 싶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버스 도착 4분 전인데, 그냥 갈까 돌아갈까...’

몸은 앞으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지만 마음은 계속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할아버지, 도와드릴까요?, 제 전화로 걸어볼까요?”

최대한 상냥하고 조심스러운 톤으로 말을 걸었다. 이날 따라 유독 짧은 반바지에 바캉스를 떠날듯한 복장이 할아버지에게 못 미더워 보이지는 않을까 살짝 신경이 쓰였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난.”

느릿느릿 예의 바른 몇 글자를 나에게 쥐어주시고는 고개를 돌리셨다.

혹시나 했는데, 횡설수설하시거나 불안감이 묻어있지는 않은 목소리라 다시 가던 길을 갔다. 근처니까 1분쯤 뛰면 늦지는 않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빠르게 걷는데 자꾸 뒤통수가 불편했다.


그냥 무시하고 등 뒤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볼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집 앞에 나오신 걸 수도 있는데 괜히 오바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짧은 순간 이런저런 갈등을 하다 안 되겠다 싶어 다시 방향을 돌려 할아버지 쪽으로 돌아가는데, 몇 미터쯤 뒤에 서있던 아저씨가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매번 연습하는데도 뭘 그리 꾸물대고 빨리빨리 못하느냐고 잔소리를 하며 이런저런 손가락질도 하는 걸로 보아, 혹시나 벌어질 사고에 대비해서 훈련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뜨거운 땡볕에, 느릿한 할아버지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것에, 조금 지치고 짜증스러웠던 것 같다만 가족 특유의 걱정스러움과 유대감은 있어 보였다.


‘그래도 다행이다. 길을 잃으신 게 아니어서...’

어쩌면 이미 평범한 일상의 길은 잃으셨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런 할아버지에게 짜증을 내면서라도 기다리는 전화번호가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고 고마웠다. 버려진 게 아니라서, 잊혀진 게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다시 정류장을 향해 열심히 뛰어 도착하는 그 순간 막 내 앞에 멈춰 선 빨강 버스의 문이 열렸다.

아~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어쩌면 흔히 말하는 착한 일, 선한 일... 그거 자기 마음 편하기 위해 하는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만 그래도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평소보다 조금 더 높아진 톤으로, 기사 아저씨에게 명랑한 인사를 건네며 버스에 올랐다.

냉방이 잘 되고 있는 광역 버스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 후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늘 나를 기다려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 혹여나 내가 길을 잃더라도 기꺼이 나를 기다려줄 좋은 사람들의 얼굴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시원하게 잘 익은 수박 같은 웃음이 스르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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