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재회

노처녀 성장 소설

by 유니스 황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먹자골목 사거리에 예술거리를 만들고자 하던 동네 호프집 사장님의 노력으로 나름 무대 비스무리하게 세워진 단 위에 있었던 피아노. 그땐 나도 술 먹고 지나가다 두어 번쯤 피아노를 치며 지나는 시민들에게 깜짝 연주를 해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계절 내내 야외에서 방치되고 온갖 취객의 마구잡이 두드림에 노출된 피아노는 점점 상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비와 눈이 오는데도 거리에서 속수무책 맨몸으로 방치되고 있어 그 주인께 커버라도 씌워 관리하시라 조언을 했었다만, 그런 것 아니더라도 신경 쓸 일, 돈 들어갈 일이 많은지 별 변화가 없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새벽에 쾅쾅대는 취객들로 인해 종종 소음 신고가 들어갔고, 어떤 이는 불법 폐기물 방치 신고를 하기까지 해 딱지가 붙은 걸 본 적도 있다. 어느 날인가는 있던 자리에서 쫓겨나 다시 호프집 안으로 들어간 피아노를 발견하기도 했고.


얼마나 지났을까... 몇 달 전부터 비닐 커버 하나 덧씌워진 채 호프집 앞 거리로 나와 있는 피아노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왠지 온갖 험한 곳을 전전하다 외딴섬 술집으로 흘러들어온 늙은 작부의 느낌이 났다.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한 채 구석에 형식적으로 놓인 벤치와 다를 바 없는, 무수한 미녀가 항시 대기하고 있다고 말하는 빛바랜 광고 풍선 같은, 그저 그렇게 큰 의미 없이 존재만 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초라하게 앉아 있었다.

이미 소리로도 제 몫을 하지 못하는 듯했고, 다들 별 관심을 가져주지도 않아 보였다. 단지 "피아노가 길에 있다"정도의 상징성만 부여하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를 나도 몇 달째 무시한 채 지나쳤었다.

맥주 몇 캔을 마시고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불현듯 피아노에게로 가고 싶었다. 날이 좋아 그런지 간만에 비닐 커버도 벗겨져있었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취객들도 거의 떠나간 시각.


나는 그 누구도 아닌 피아노만을 위해 연주를 했다. 혹시 큰소리가 나면 신고가 들어갈까 싶어 살금살금 부드럽게. 물론 너무 고장 나고 상한 몸이라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 건반도 많았고, 딱 병든 80살 노인 정도의 컨디션이라 작정하고 큰소리를 낼래야 내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그러기에 어디가 아픈지, 견딜 만은 한지, 지내기가 많이 힘든지는 않은지를 조심조심 물어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너무 오랜만에 누군가와 만나 대화를 하는 거라 그런지 그녀는 꽤나 어색해했으며, 목소리가 자꾸 걸리고 안 나와 힘겨워하기도 했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이문세의 <옛사랑>을 쳤고, 가을바람이 좋아 <autumn leaves>를 쳤으며, 내 새 앨범에 수록된 신상 <소양강 처녀>도 살짝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냉장고 바지에 쪼리를 신은 쌩얼의 허름한 차림이었다만 아무도 의식하지도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고, 오직 그녀만 바라보고 그녀의 말에만 조용히 집중해줬다.


부디, 있는 날까지 너무 슬프지 않게 잘 버텨달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손 놓고 있던 피아노를 다시 열심히 하라는, 마음의 노래를 더욱 자주 부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두 손을 잠시 마주 잡고 있다 헤어졌다.
하루 종일 열려져 있던 문으로 힐끔거림을 당했을 그녀를 위해 조용히 뚜껑을 닫아 주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있어야 할 제자리를 찾지 못한 존재들은 참 서글프다. 돌아올 집이 있고, 내 자리가 있음에도 노력보단 불평을 일삼으며 게으름을 피울 때가 더 많은 나를 다시 돌아보는 새벽.

피아노는 오늘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사람들은 지나쳐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