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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스 황 Jun 24. 2017

서른아홉 노처녀의 생애 첫 소개팅 3

노처녀 성장소설

#5. 엔딩은 꼭 클리쉐.


K는 나름 미술의 명가 H대 대학원 예술사 후배며 전시기획 때 밑에 있던 매우 일 잘하는 직원이었다고 그녀를 소개했다. 

‘이런 제길, 난 이번에 전과해서 그 학교에 들어갔으니 내 선배인 겐가?’ 

그리고 나에 대해선 화가 H와 소개팅한 여자이지만 둘 다 서로를 싫어한다고 소개했다. 비록 H와 난 서로에 대해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계속되는 농담 속에 만나면 안 될 사이가 되었고 설사 H가 나를 만난다 한들 못생긴 여자를 구원해주는 숭고한 만남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아니, 이런 여자가 왜 싫어? 나도 이렇게 멋있게 나이 먹고 싶은데? 한눈에 봐도 딱 포스 있고 자유로운 영혼 같잖아.” 그녀가 말했다.


“처음 봤는데 한눈에 그런 게 딱 보이니?” 조용하던 화가 H아저씨가 물었다.


“아~ 딱 봐도 느껴지잖아.” 그닥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을 갑자기 등장한 그녀가 ‘옛다, 칭찬’이라는 눈빛과 함께 나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는 짧은 소개의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K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아까부터 K를 지켜봤다며, 자기를 너무 좋아한다고 따라다니는 남자와 이 술집에 함께 있었는데 K와 이야기하고 싶어 보내고 왔다며… 뭔가 유부남을 사랑하는 미혼 여자의 상투적인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야, 잘하면 네 아빠뻘이겠다.’ 속으로 생각하며 그녀가 더듬적거리는 K의 무릎을 한번 쏘아주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로부터 10분이 넘게 그 둘은, 아니 그녀는 K에게 자신의 말을 쏟아냈다. 


“아니 같은 직원인데 내가 미영이보다 못한 게 뭐가 있다고, 국장님은 나를 왜 인정 안 해 주는데요. 내가 국장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 진짜 나 좋다는 남자도 버리고 왔는데… 내가 얼마나 국장님에게 잘하는데..”


‘아 저렇게 예쁘고 젊고 똑똑하다는 애가 뭐가 아쉬워서 저러지?’라는 생각과 동시에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 잠자던 워리어 황실장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잠깐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화가 아저씨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또 예의 없이 자기들 이야기만 하고 사람을 소외시킨다고 그들에게 한마디 하셨지만 그들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해주지 않았다. 

상태를 미루어 짐작하면 갤러리 K는 조금 취했을 수도 있다 쳐도, K의 무릎을 자기 것인 양 자유롭게 쓰다듬고 있는 그녀는 술을 빙자해 또라이 짓을 하기엔 너무도 멀쩡해 보였다.


다시 나타난 화가 아저씨에게 아마도 갤러리스트인 이 여자아이는 꺄악~ 아이돌 오빠라도 만난 양 그의 이름을 환호하며 불러댔다. 


“사실 내 마음속엔 H 선생님 밖엔 없었어요. 내가 얼마나 팬인데.. 나 선생님이랑 친해지면 안 돼? 내가 제일 친해지고 싶은데..” 

K의 팔짱을 끼고 기댄 채 얘기하는 말치곤 참 어울리지 않는 대사였다.


“친해지면 되지.”라는 화가 아저씨의 말에 난 그들이 제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어이없는 코웃음을 치며 웃어줬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톡의 사용 여부를 묻는 그녀는 화가 아저씨 H의 전화번호를 얻어냈다. 나도 아직 모르는 그의 전화번호를.


“끼야~ 나 H 전화번호 땄다.” 이미 존칭이 생략되고 불려지는 이름. 그리고는 바로 오빠라고 불리는 그 이름.


“아이~ 기분 참 이상하고 더러운데. 엔딩이 너무 심한 클리쉐잖아.” 

난 뻔하고 상투적인 아침드라마스러운 그 장면에 짜증이 나서 한마디 던져버렸다.


“아 엔딩이 클리쉐라는 말을 들으니 자존심 상하는데?”라는 말을 그녀는 너무도 명랑한 톤으로, 나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공중에 던졌다. 


K와 H는 이야기 중이었지만 들었을 것도 같은데. 별 반응이 없었다. 

'못 들은 건 아닐 텐데… 클리쉐의 뜻을 모르나?'


어쨌든 다시 소란이 시작되었다. 그녀만의 독주. 영화에서 다방 레지로 나왔던 전도현의 싼 티 나는 콧소리가 잔뜩 묻어나는 흘렁거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이젠 대놓고 몇 분에 한 번씩 시작되는 화가 H의 섹시함 찬양. 


“솔직히 H 너무 섹시하지 않아요? 정말 말도 안 되게 너무 섹시해. 내 맘속엔 옛날부터 H만 있었다구.”


‘오. 마이. 갓!! 저건 또 뭔 개소리지?’

 아.. 이 기집애, 불합리하고 합당하지 않은 일을 보면 정의의 이름으로 누구라도 용서치 않는 황실장의 성격까지는 아직 간파하지 못했나 보다.


#6. 워리어 황실장이 깨어난다.


“헤이, 국장님의 팔짱을 끼고선 다른 남자인 H 밖에 없다고, 내 맘속엔 H가 다라고 하면 그 이야기가 진정성이 있게 들릴까?” 

좀 더 공격적으로 대처를 하기로 마음먹고 대사를 던졌다. 이제 나에겐 싸구려와 동의어인 그녀에게. 

그래도 소개팅 자리에 나온 여자의 대사치곤 좀 과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살아나는 황실장 본능을 주체할 수없었다. 그렇지만 눈 깜짝하지 않고 계속 H의 섹시함과 작품에 대한 찬양을 이어가는 그녀, 아니 그. 년. 


싸늘한 눈초리로 나이 먹은 화가 H를 한번 바라봐 줬다. 칭찬은 누가 하든 기분 좋은 것, 하지만 새로 나타난 어린 여자애가 하면 더 기분이 좋은 것이라는 듯 그는 부정하지 않는 조용함으로 동조하고 있었다. 


“원래 내 작품 좋아하는 사람들이 좀 똑똑하지.” 

조용하던 H가 한마디 한다.


‘뭐야, 저 교만함은… 어린애가 좋다니 급 빵끗 하시는구만. 역시 당신도 예술 한답시고 자유로운 영혼과 바람기를 혼동하고 있는 사람이었나? 고등학교 때 고전에 빠져서 독일 철학가들의 책을 엄청 읽었다던 K의 증언에 조금은 좋은 점수를 주었더니만… 역시 다 똑같아. 아이씨, 싸구려 같아.’ 

난 점점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져 가고 있었다. 이젠 무슨 이야기를 듣던 나쁜 뜻으로 해석이 되리라.


‘아, 그냥 다시는 안 보면 되니깐 싹 뒤집어 버리고 나가버려?’ 

황실장이 생각한다. 


‘우린 어찌 되었든 모두 선생님의 제자. 고귀한 서정시인의 안목을 욕보일 순 없잖아. 어쩜 그리 안 예쁘고 성격도 더러운 애를 소개시켜 주셨냐는 면박은 받으시면 안 되잖아. 안 그래도 늘 쓸쓸한 미소를 지으시는 선생님인데. 나마저 슬프게 해드리면 안 되는데…’

그리고 다시 드는 생각. 

‘내가 그리 유명하진 않아도 나름 아티스트 대우를 해주는 사람들도 있는데… 괜히 소문나면 따뜻한 음악을 하는 뮤지션의 이미지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잖아.’ 

내 안의 유니스가 말리고 있었다. 


“아! 도저히 안 되겠네~ 저 먼저 일어날게요. 제가 사는 세상에서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런 장면이 일어나지 않거든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


갑자기 찬물이 끼얹어지며 얼어붙는 듯했지만 금세 땡이 외쳐진 듯 배웅을 위해 자리에서 함께 일어났다. 

‘우와.. 대박!! 예의상이라도 아무도 안 잡는구나.’


“아, 일어나지 마세요. 나만 빼고는 즐거우신 것 같으니 계속 재미있게 노세요, 들.”

눈이 마주치면 혹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벽에 가득한 낙서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얼굴도 성격도 별로야. 역시 결혼은 안 되겠어”라는 제법 큰 글씨로 쓰여진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무슨 짜 놓은 영화도 아니고 대체 뭐지? 혹시 트루먼쇼나 몰카 같은 건가?’


또각또각 거침없는 빠른 발걸음으로 실내포차를 나왔다. <절벽>이라는 포차의 이름 또한 처음 들어갔을 때 보다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조용히 앉아 있던 H가 따라 나왔다. 


“저는 오늘 이 상황이 너무 불쾌하고 이해가 되지 않아요. 지금 기분이 너무 더러워요.” 또각또각 거리는 발걸음에 박자를 맞춰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물론 나의 시선은 대로 쪽인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너무 이상하고 난감한 기분이에요.” 

그는 자기도 나와 같은 편인 양 대꾸를 했다. 


“뭐~ 걔랑 맞장구치며 똑같더구만~!”

난 조용히 방관하는 것도 죄라는 결론을 내렸고 더 이상은 변명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싸늘하고, 어쩌면 그가 상당히 쫄 수도 있는 눈빛으로 돌아봐줬다. 이렇게 된 판국에 나이고 뭐고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아, 내가 그랬나요?”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하던 H는 택시를 잡고 있는 내 뒤에 멀뚱히 서있는 것 같았다. 


“저 갈게요.” 하고 택시 문을 힘차게 닫았다. 서서히 움직이던 택시는 경기도인 행선지를 듣자마자 미터 대로는 갈 수 없다고 했다. 돈을 더 달라고 요구했다.


‘아, 진짜 오늘 날 잡았니? 왜들 이래..’


“그럼 저 그냥 내릴래요. 우리 한강콜 부를래요.”

오늘도 택시 파업 문자를 친절하게 보내주신, 미터대로만 돈을 받으시는 한강콜 택시가 유일한 내 편이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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