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니스 황 Jun 24. 2017

서른아홉 노처녀의 생애 첫 소개팅 5

노처녀 성장소설

#9. 과학수사대 혹은 심야 추리극장


그날 밤 간만에 운동을 하고는 언니네 집에 갔다. 형부는 밥 먹으면서 언니 꿈 얘기나 들으라고 했다.

 

‘아, 그놈의 네버엔딩 꿈 이야기.’ 하지만 워낙 예지몽을 잘 꾸는 우리 자매들에게 전날의 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의식과도 같았다. 심지어 내 꿈 이라니깐 혹한다.


“꿈에 어떤 점쟁이가 나타나서 네가 결혼을 한다는 거야. 그래서 누구랑 하냐니깐 사진을 찍는 사람이랑 결혼을 한다는 거야. 너 예전에 친했던 사진 찍는 걔랑 그냥 결혼해버려라.” 


진짜 황당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전날 만났던 화가 H는 극사실주의 작가여서 그림을 사진 찍어내듯 그리는 사람인데… 물론 검색을 통해서 나온 결과였다. 그리고 그는 선생님께서 말한 액수보다도 몇 배나 큰 금액으로 외국의 유명 경매에서 작품을 팔았던 작가였다. 


난 꿀꿀한 이 기분이 정리될 때까지는 당분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해야겠다는 다짐을 금세 버리고 거의 모든 일상의 얘기를 함께 공유하는 언니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뭐 대충 뺄 거 빼고 중요한 요점만.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많은 부분이 나의 관점으로 미화되었거나 강조되었으리라. 


내가 이렇게 언니에게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이유 중 하나는 진짜 그들이 왜 그랬는지를 이성적으로 이해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여 내가 이상한 아이인가, 혹은 소개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가를 진짜 알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언니는 얘기가 끝난 나에게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건넸다.


“그래서 그다음 꿈엔 네 오른쪽 뺨에 상처가 심하게 난 게 보였군.”

첫 번째 꿈의 신뢰도가 몇 프로 더 상승되는 순간이었다. 


‘아… 뭔가 자꾸만 운명 지어지는 게 두렵다. 아니면 내가 너무 오버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인가?’

언니는 심지어 둘이 함께 맞대어도 정답이 잘 안 나오는 그들의 심리분석을 위해 형부까지 동원시켰다. 


“아 진짜~ 온 동네방네 다 소문낼래?”

라고 한번 큰소리를 지르기는 했지만 그럼 딱 한 가지 짧은 질문만을 하겠다고 형부에게 말을 했다. 하지만 즉각 대답하는 형부의 확신에 찬 대답과 그나마 제일 그럴듯한 부가 설명이 나의 맘을 움직였다. 

난 언니에게 보단 좀 더 간결했지만 형부가 더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게 거의 모든 단서들과 정황을 빠르게 설명했다. 이제 나의 소개팅은 코믹에서 추리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10. 결과 도출 


모든 정황을 미루어 본형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갤러리 K는 선수, 화가 H는 순진남. 혹여 화가 H가 내가 생각하는 바람둥이 선수였다면 어린 여자애가 전화번호를 물었을 때 내 앞에서 절대 주지 않았을 것이며,

 ‘아이, 곤란하게 왜 이러세요.’등의 부드러운 멘트로 자신을 포장하며 다른 기회를 엿보았을 것이다. 


2. 그런 상또라이 같은 여자애들은 꽤나 많으나 그들은 그런 여자애를 그리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3. 정황상 그 남자들 둘 다 나를 꽤 괜찮게 생각하며 마음에 들어했을 것이다.


4. 내 말만 들었기 때문에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판단할 수 없지만, 나만 괜찮다면 따로 두어 번 더 만나보고 나서 그래도 이상하면 그때 그만둬도 늦지 않는다.


뭔가 내 엔딩보다는 솔깃한 결론이었다. 갑자기 고장 나있던 교만 옵션이 스물스물 살아난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나를 극도로 못생기고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아.ㅋㅋ’


언니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난 동성들에겐 참으로 유연하게 잘 하는데 이성들과의 관계에선 극도로 날을 새우며 방어벽을 쌓는 못되고 불필요한 버릇이 있다.


2. 자신이 화가 H라도 날을 잔뜩 세운 내 앞에선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사과 전화를 해야 하는데…’ 하며 불편한 마음으로 고민 중 일 것이다.


3. 검색된 그림과 그의 사진을 보면 이런 고뇌에 찬 아픈 눈빛을 그리는 사람이 그리 가벼울 리 없고, 이 사람 인상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다. 단지 매너에 익숙지 않을 뿐. 그리고 나랑 꽤 잘 어울림.


4. “야, 그냥 둘 다 너 좋아한 것 같아. 갤러리 K는 생각보다 더 괜찮고 뭔가 있어 보이는 네가 나타나니깐 나이 먹은 화가 H에게 질투 났던 거야. 자긴 못 먹으니 남 주기도 싫은 마음이지.”


5. 나이 어린 내가 먼저 사과하는 게 맞다. 나도 충분히 건방지고 까칠했음은 안 봐도 비디오다. 내일 오후에 그 부분은 당장 사과할 것.


‘아… 부부는 일심동체, 아무리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은근히 치우친 결론이다.’

한창, 어리고 상큼하며 나름 괜찮고 도도했던 내 리즈시절 모습의 증인이었던 그들은 참으로 객관적이지 못한 그들만의 결과를 도출해냈다. 

‘아니, 이 언니~ 그림을 보더니 갑자기 팬이 되어 버리셨나. 왜 그 화가를 자꾸만 변론해주고 편들어줘.’


하지만 이미 정답, 오답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난 나를 위로할 만한, 내가 다시 길 잃은 나를 찾을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해냈으니 그걸로 된 거다.

‘그래, 뭐 난 생각보다 더 멋지고 쿨한 사람이라는 걸 좀 더 보여주지.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을 보여주는 나의 컨셉답게.’

하긴 어린 여자애 때문에 객관성을 마구 상실하고 막 행동했던 부분은 나이도 10살이나 많은 남자 어른들에게 나도 좀 심했다. 


도를 넘었던 부분은 다시 수정하자. 우린 좀 오랫동안 술을 마셨고 좀 지쳐있었던 걸로 결론 내는 걸로. 내일 내가 먼저 사과하는 걸로. 

그렇게 조금은 시시하지만 훈훈한 마무리로 끝내자고. 어차피 처음엔 거창했던 드라마의 결론들도 대부분 예상보다 건전하고 시시한 거니깐. 특히나 너무 자극적인 막장드라마는 내 스타일이 아니니깐.

매거진의 이전글 서른아홉 노처녀의 생애 첫 소개팅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