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나이 들어 보이지는 말게요.
막 서른이 되었을 때 나이 들어 보이려고 안경을 쓰고 클래식한 단색 정장을 입고 그랬는데,
마흔이 넘어가면서는 늙어(?) 보이는 게 싫었다.
올해 미용실에 가면서 주문할 때..
‘이십대 스타일 말고, 그런데 또 너무 사십대 스타일 말고.. 적당히 어려 보이되 가볍지는 않아 보이는 거요.' 마스크에 절반은 가려져 미용사의 얼굴 표정을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내 주문이 쉽지 않은 것 같다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이제는 굽이 높은 구두를 신으면 피곤해진다.
운동화와 슬리퍼가 점점 좋아진다.
파스텔 색의 옷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액세서리는 보관함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
화장품 파우치는 용도가 점점 달라진다.
작년인가, 2년 후에 칠십이 되는 엄마가 얕은 한숨과 함께 읊조리셨다.
'예전에는 가방이나 옷에 주머니가 있으면 모양이 안 나서 그런 디자인을 피했는데.
이제는 모양보다는 수납이 쉽고 편하게 된 옷과 가방을 고르게 되네.
자꾸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게 점차 늘어나다 보니, 조금씩 포기하게 되네.'
언제인가부터는 엄마와 나이듦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마흔에 접어들면서 엄마를 따라가는 일을 비켜지나 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나와 부모님의 비슷한 나이대의 사회 활동의 모습은 시대차이 때문에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나이듦에 대한 신체의 변화만큼은 크게 오차가 없구나 싶다.
사람에게 있어 '나이듦'에 대해서만큼은 공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자의 나이듦은 풀기 어려운 숙제 같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속해 있던 어떤 그룹에서 이탈되는 느낌이 조금씩은 있었는데, 코로나라는 시간의 단절을 지나면서 길을 잃은 듯하다.
소속감을 느낄만한 그룹을(직장을 제외하고) 찾기란 아직도 쉽지 않게 느껴진다.
마흔이 넘었을 때는 그저 나이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복귀를 하는 과정에서,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없던 그 생각의 정체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이십대와 삼십대에 포기했던 너의 제일 예쁜 시기가 백지라서. 엄마는 안타까워. 네가 이십대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지금을 예쁘게 살면 어떨까.'
칠십에 가까워져 가는 엄마는 삶의 고민과 깨달음, 배움과 도전은 선택할 수 있다 말한다. 엄마의 말을 듣고 그저 매일매일 삶을 살아가는 것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칠십이 다 돼도 엄마도 계속 내려놓는 연습을 해. 나이듦도 공부해야 하고 훈련을 해야 되더라. 나이가 들면 모든 게 쉬워지고 편해지고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꼭 그렇지도 않거든.'
나이는 보여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나..)
나이는 사람됨(그 사람의 살아온 시간)을 느끼게 하는 수단이다.
앞으로 ‘나이 들어 보이지 않게요' 말고
‘잘 어울리게 해 주세요'라고 외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