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네가 알아서 해!

by 쓰담홍

"그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네가 알아서 해!"


오늘 아침에 내가 아이에게 한 말이다. 최근에 내가 하는 말끝에 아이에게 돌아오는 말은 "나도 알아." 또는 "내가 알아서 할게."다. "응"이라는 화답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사춘기 뇌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이해해줘야 하나. 아니 이해까지 아니더라도 그런가 보다 해야 하나. 아직 자리는 중이니깐 그럴 수 있고, 아이도 혼란스러울 거라며 은근슬쩍 나에게 올라오는 감정들을 모른 척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자 은연중 불안이 올라온다.


‘이러다가 아이가 예의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면 어쩌지?’하는 걱정과 동시에 ‘나를 무시하는 건가?’하는 열등의식이 나도 모르게 올라와 어느 순간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고 화르르 입에서 불을 내 뿜어었다.


『부모와 아이 중 한 사람은 어른이어야 한다, 임영주 지음』라는 책 제목이 상기된다. 부모와 아이, 그중 내가 어른이고 싶다는 강박도 함께. 이 강박이 억압으로 둔갑해 스트레스로 몰려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책에서는 또 이렇게 말한다. "아이는 아이의 자리에, 어른은 어른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혹 자녀한테 지나치게 착한 아이, 말 잘 듣는 딸, 믿음직한 아들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라." 이 문장을 바라보다 내가 아이에게 무엇을 바랐는지 살펴본다. 아이가 약속한 시간에 맞춰 이동하길 바랐다.


오전 9시에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예매 한 상태였다. 나는 7시에 일어나 씻고, 간단하게 아침을 준비했다. 7시 30분에 아이들과 남편을 깨웠지만 그 누구도 한 번에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두어 번 이야기하고서야 겨우 일어나 다들 어그적 어그적 씻고 식탁 앞에 앉았다. 식탁 앞에서도 부지런히 먹기보단 TV채널을 돌리며 느긋하기 그지없다. 집에서 8시 30분에는 출발해야 되는데 말이다.


그중 더 느긋한 아이 한 명에게 "우리 8시 30분에 나가야 돼"라고 말했다. 그러자 돌아온 답변은 투명스럽게 "나도 알아."였고, 그와 동시에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밥그릇을 싱크대에 담갔다. 내가 보는 시선에서 아이의 행동은 무례했다.


여기서 '투명스럽게', '무례하게'는 지극히 나의 주관적인 관점이다. 결국 내가 받아들이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이걸 가지고 화내는 게 맞아?' 나는 이런 나에게 화가 더 난다. 내 감정에 충실하기보다는 화를 내고 나서도 편하지 못한 마음. 그걸 곱씹으며 '내가 무얼 잘 못했나?'하고 스스로 신뢰하기 보단 자책하려는 모드로 가려고 한다. 물론 다음 번에 이런 상황이 생겼을 때 더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기 위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선은 내가 잘 못된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꾸 나의 행동을 돌아본다.


사람은 살다가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자신의 감정에 휘둘릴 수도 있다. 그건 나뿐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조금씩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들에 대해 스스로 엄격하게 대한다.


『감정 글쓰기, 이지한 지음』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고통받는 자신에게 친절해진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스스로에게 '가용한 evailable" 상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가까운 친구가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야?"라고 물으면, 가능하다 available는 답변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때, 다른 일을 하면서 'available'해질 수 없습니다. 정서적으로 가용한 상태는 그냥 잠시 눈길을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하던 일을 딱 멈추고 산만하게 흩어진 마음을 모아서 그 곁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렇다. 다른 이가 이런 일을 하소연한다면 "그럴 수 있지. 당연히 화나지. 나 같았아도 그랬을 거야."라고 말할 거면서, 나의 행동을 자꾸 돌아보고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한 내가 못 마땅해 입을 쭉 내밀고 눈썹은 세모모양을 하고 있다. 아니, 쭉 나온 입술을 다시 집어넣어 평평하게 만들고, 세모 눈썹을 둥글게 이동시키기 위해 나는 지금 이렇게 내 곁에 머물며 마음을 살피는 글을 쓰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렇게 내가 나의 마음을 살피며 나에게 곁을 내 주어다 보면, 나의 감정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괜찮다가도 안 괜찮아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고 감정인 걸 알기에, 오늘도 나는 글을 쓰며 나를 바라본다. 쓰기의 나날로 보낸 시간에는 '결'이 남는다는 서윤후 시인의 말을 감슴에 담으면서 말이다. 나를 따뜻하게 보온해 본다.


"쓰기의 나날로 보낸 시간에는 '결'이 남는다. 사전적 의미로는 "나무, 돌, 살갗 따위에서 조직의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를 뜻한다. 사건이나 추억에 마디를 갖는 시간이 아니라, 쓰기의 나날로 붙잡아둔 것, 그 속에서도 계속 놓치게 되는 것들로 엮는 일종의 시간의 짜임이다. 오래된 스웨터처럼 쓰기의 나날들은 따뜻하게 나를 보온하기도 했다. 때로는 무겁고 성가시기도 해서 훌러덩 벗어던지고 싶었다. 시간에 결이 생기면 그것은 피부처럼 가까워지기게 되는 바람에 나는 그만두지 못했다. 그만둘 용기도 없다."(『쓰기 일기, 서윤후 산문집』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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