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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담홍 Aug 11. 2023

최저 임금을 받고 일하고 있습니다. (2)

엄마가 된 후 일을 변천사

새로 출근한 회사는 직원에 세 명이었다. 사장, 과장, 대리(나). 사장님과 과장님은 주로 현장 출장을 갔고, 나는 사무실에서 보고서 처리를 했다. 출산 예정일을 앞두고 출산 휴가 3개월과 육아휴직 3개월을 썼다. 아이를 출산하고 6개월이 지난 뒤 복직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복직은 계속 미루어졌다.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나는 복직을 할 수 있다는 기대로 아이에게 전집을 왕창 사 주었다. 그러나 복직이 계속 미루어지자, 책 할부 값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결국 아이 전집을 산 곳에서 영업사원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아이는 생후 6개월 만에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영사의 길은 쉽지 않았다.     


[나는 죽도록 노력해 볼 거다. 죽도록... 우리 딸을, 우리 신랑을, 나 자신을 위해서... 죽을 만큼 해 보자! 아자! 난 할 거야! 해 낼 거야, 꼭, 꼭!! 2012. 6. 19. 일기]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버는 돈보다 지출이 더 많았다. 내가 내 아이 책을 사서 수당을 받는 구조로 되어갔다.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산다고 하면 빚을 내는 방법을 알려주는 선임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탓하지 않는다. 선택은 나의 몫이었으니깐. 영사 6개월의 시간은 세상 물정 모르는 나, 우울 안에 살던 나를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6개월이 6년 같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둘째가 나에게 왔다. 첫째 아이 돌쯤이었다. 막막했다. 영사를 계속할 자신도 없었지만, 책 사면서 빚진 돈을 갚을 엄두는 더욱더 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때 마침, 회사에서 복직을 이야기했다. 고정 수입의 절실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출근을 시작했고, 둘째 아이 출산 직후까지 회사에 다녔다. 그러나 다시 복직하지는 못했다. 역시 회사의 사정이 어려워져서였다. 다행인 건 출산휴가 3개월, 육아휴직 1년, 고용보험 6개월을 받을 수 있었다. 생계유지에 큰 보탬이 되었다.  

   

20개월밖에 차이 안 나는 두 아이를 독박유아로 키우는 건 수월치 않았다. 하지만 이 상태로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복직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둘째 돌 때쯤 첫째 아이 다니는 곳에 등원시키고 있었다. 복직이 무산되긴 했지만 나는 무언가를 배우기로 했다.  

   

여성 인력 개발원에 가서 베이비시터와 영유아 놀이 지도사 자격증을 이수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간 사이에 놀이시터 일을 하러 가정집을 방문했다. 시간당 만 원을 받고 시작했다. 놀이 수업을 진행하는 곳은 만 오천 원을 받았다. 큰돈을 번 건 아니었지만 아이들 어린이집에 간 시간을 활용할 수 있었고, 아이들 간식비 정도는 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아이들과 놀이하는 거 자신이 있었고, 즐거웠다. 그 시간이 행복하고 뿌듯한 시간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 딸들과도 더 잘 놀 수 있었다.     


놀이시터에 자신감을 붙었을 때, 보육교사 공부를 시작했다. ‘고정 수입’이 중요했고, ‘안전성’이 중요했다. 놀이시터 활동하면서 집안 살림과 아이들을 돌보며 보육교사 공부를 해나갔다. 그리고 1년 뒤 보육교사 실습 나간 곳에서 실습을 마치고, 바로 취업했다.     


최저임금이 시작되었다. 어린이집에서 일은 즐거웠지만 서서히 즐거움보단 힘듦이 더 커졌다. 육체적 노동 강도와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어린이집 선생님들과의 관계, 학부모님들과의 관계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어린아이들을 키우고 있었기에 출근하지 못하는 상황과 조퇴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자꾸 생겼다. 결국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나는 퇴사를 했다.     


육아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도 도움받을 곳이 없었지만, 이때도 역시 도움받을 사람이 없었다. 남편은 바쁜 사람이라 그 시절 나에겐 항상 부재중이었던 사람이었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고 싶어도 토요일조차 병원 한 번 가기가 힘들 시절이었다.

     

이때 퇴사는 살기 위한 퇴사였다. 몸과 영혼이 탈탈 털린 상황이었다. 신경 예민해져 화를 자주 심하게 냈다. 아이들과 남편에게. 가정의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어린이집에서 퇴사한 진짜 이유는 내가 어느 날 우리 반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나 자신도 너무 당혹스럽고 놀랐다. 그런데 그 모습을 조롱하는 선생님이 있었다. 원장님한테까지 가서 “홍 선생이 말이야, 그랬다니까요” 하면서 말이다. 꼭 ‘넌 뭐 다른 사람일 줄 알았니?’ 하는 비아냥 같이 들렸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부끄럽지만 그 당시 더 이상 아이들에게 친절할 자신이, 다정한 에너지가 없었다. 그리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어린이집에만 가면 어디서든 자세를 낮추어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삼켜야 했다. 매일 화장실 청소는 내 몫이었다. 에어컨도 마음대로 틀지 못했다. 밥도 마음 편하게 한 숟가락 뜨지 못했다. 학부모가 억지를 부려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네, 네' 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내가 미숙하고 문제 해결하는 능력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때 그 상황에선 나는 그게 최선이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약해지고 한없이 초라해지는 나를 더 이상 내가 볼 수가 없어 그만두고 나왔다. 나를 살리고 싶었다. 나를 아껴주고 싶었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겐 쉼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도서관 가서 주로 빌려봤지만 사서 읽고 싶은 책도 있었다. 그러나 책값 돈 만 원이 아쉬웠다. 그래서 또 알바를 알아봤다. 하원 도우미. 하원 한 번 해주는 데 만원. 매일 하는 게 아니어서 한 달 하고 나면 10만 원 안팎이었다. 이걸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책을 사서 읽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서울에서 경기도 쪽으로 이사를 왔고 코로나가 터졌다. 그렇게 1년이 지난 뒤, 첫째 아이 임신했을 때 다녔던, 둘째 아이 출산 직전까지 다녔단 회사 사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집에서 재택근무를 제안하셨다. 나는 흔쾌해 수락했고, 지금 집에서 최저 임금을 받고 일을 하고 있다.     


결혼 이후, 나의 월급은 오르지 않았다. 계속 해서 떨어져서 결국 지금은 최저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가끔은 서글프기도 하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그 사이사이 고군분투했던 시간. 그런데도 그 모든 기준에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를 지키는 일, 아이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다녔다.     


지금 재택근무 역시 내가 옆에서 아이들을 챙길 수 있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쩜 나는 지금보다 더 못한 상황으로 갈 수도 있다. 일에 있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성장하는 중이다. 나중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표면적인 모습이 될지 모르지만, 그 속은 꽉 차 있을 테니깐.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좋지만

무언가를 원한다면 무엇이든 부딪쳐 보며 나를 깨고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나는 아직도 앞으로의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고, 죽을 때까지도 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를 것이다. 지금처럼 계속 최저임금을 받고 살아갈지, 이것마저도 놓아야 할 때가 올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일로 성공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면 나는 오늘도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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