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를 읽으며...
p.73 아이가 죽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아이의 비명을 들었는데 왜 그에 대해 아이에게 한 번도 직접 묻지 않는가. 아이의 비명을 생생하게 들었는데 왜 아이만 빼놓고 주변만 분주한가. 변죽만 울린다는 건 그런 것이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오브코스다.
p.75 정확한 이해와 공감이 가장 전문가적 조치에 해당한다.
p.76 질병이 아닌 일상의 영역에선 사람에 대한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반응이 때론 가장 효과적인 치유다. 그것이 사람 마음에 더 빠르게 스미고 와닿는다. 그런 일의 위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탁월한 치유자가 된다. 어떤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라도 그 고통스러운 마음에 눈을 맞추고 그의 마음이 어떤지 피하지 않고 물어봐줄 수 있고, 그걸 들으면서 이해하고, 이해되는 만큼만 공감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도움이 되는 도움이다.
p.76 흔들리는 엄마의 눈동자, 돈가스 집에서 엄마와 마주하고 밥을 먹던 시간은 가는 숨을 몰아쉬던 아이에게 호흡을 편안하게 해주는 고압 산소통이었다. 엄청난 치유적 효과가 있는 행위다.
<출처 : 당신이 옳다, 정혜신 지음>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병원부터 가봐야 하나, 심리검사를 받아봐야 하느냐며 병원에 의지할 생각부터 했다. 육아가 쉽지 않다. 늘 갈팡질팡하며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하나가 툭 튀어나온다. 특히 우리 섬세한 첫째를 보며 고민의 순간들이 많았다.
다섯 살 때 시작된 죽음의 공포. 죽음의 공포 앞에 아이는 매일 밤 울었고, 자다가 소변 실수를 계속했다. 거기다 어린이집 거부까지. 결국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으로 옮기고 아이는 점차 안정되어 갔다. 그럴 때 곁에 좀 더 있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한 결정은 원을 옮기는 행위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에게 유치원이 잘 맞았다는 거다.
초4가 되면서 또 한 번 폭풍우가 몰려왔다. 공부에 대한 강박이라고 해야 할까. 공부는 잘 하고 싶지만 공부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으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아이.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공부를 시켜달라고 하면서 정작 공부할 때 짜증이 심했다. 4학년 때 처음 수학 학원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아이는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다시 나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5학년이 되면서 차츰 괜찮아져 수학 학원을 다시 다니고 있다.
6학년이 되어서는 친구들과 갈등으로 문제가 생겼었다. 왕따에서 학폭으로 연결될 뻔까지 한 사건. 다행히 아이는 잘 이겨내고 있지만 눈을 깜박거리는 틱 증상을 보이고 있다. 다행히 지금 점차 나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되도록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하고, 아이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뒤로 밀릴 때 힘들다.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기 위해선 나에게도 충분한 에너지가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걸, 존재 육아를 들으면서, 육아서를 접하면서 알게 됐다.
지금 이렇게 매일 나를 바라보며 쓰는 시간이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한다. 나 잘하고 있다고 말해 달라고,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꼭 안아달라고. 알아서 해 주면 좋겠지만, 알아서 안 해주니 챙겨달라고 보채본다.
에너지를 만땅 충전하고, 이 에너지를 아이들에게 다시 전달해 본다.
이번 주 토요일에 버스타고 첫째와 단둘이 병원에 가기로 했다. 그것만으로도 얼굴이 환하게 만개하는 아이. 늘 엄마와 단둘의 시간을 원하지만, 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첫째. 토요일은 온전히 첫째 곁에 머물러야겠다.
내 새끼 마음 공감 외주화 시키지 말고, 내 새끼 마음 내가 알아줘야지!
(그러나 외주가 필요한 순간도 있다는 걸 잊지 말자! 현명하고 지혜로운 엄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