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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담홍 Apr 30. 2024

'회사 그만두고 혼자 해외여행 다녀오고 싶어’

‘회사 그만두고 혼자 해외여행 다녀오고 싶어’라고 남편이 말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지금까지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회사 다니기 너무 싫어.”

“기타 배우고 싶어.”

“골프 배우고 싶어.”     

.

.

.     

“회사 그만두고 혼자 해외여행 다녀오고 싶어.”     


마흔 앓이를 하고 있는 걸까.     


남편에 3년 전부터 회사 다니기 싫다는 말을 하더니 급기야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결혼해서 15년 동안 지금까지 일한 것에 대한 쉼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도 분명 알고 있다.

머리로는 ‘알겠어.’ 하면서 마음으로는 대책 없는 남편에게 화가 났다.     


하고 싶은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말 할 때마다

연말에 나오는 성과급 일부를 2년 연속 백만 원, 이백만 원쥐어줬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큰돈이 아닐 수 있다. 명품 가방 하나 사기도 힘든 돈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우리 형편에, 내 마음에서는 큰 선심을 쓴 것이다.      


남편은 그 돈으로 한 번은 기타를 사고 한 번은 골프를 배웠다. 기타는 방치 중이고, 골프는 아직도 열심히 잘 다니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회사를 그만두고 혼자 해외여행을 간다고 한다.

이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들어왔다.      


보내주고 싶다 vs 얄밉다.     


힘들다는 사람, 리프레쉬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그런 시간을 주고 싶은 마음이 당연히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내 삶을 돌아보게 했다. ‘결혼해서 누구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았을까. 누구는 일 안 하고 놀고 있었나. 옆에 있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나?’ 하는 마음에 남편이 괘씹했고, 내가 보기에는 누구보다도 즐겁게 살고 있는 사람이 끊임없이 욕심을 부린다는 생각에 얄미운 감정이 올라왔다.     


10년 넘게 나는 독박 육아를 했고, 그 사이에 전업주부과 워킹맘을 왔다 갔다 했다. 남편은 일한다고 바쁘다는 이유로 육아를 나에게 다 떠넘겼고, 자기 시간이 날 때야 아이들과 나를 봤던 사람이다. 매일 ‘어쩔 수 없어’라는 말을 달고 살며 야근과 회식에 최선을 다했다. 귀가 시간은 항상 12시 언저리였으며 툭하면 출장을 갔던 사람. 회식하는 날은 새벽을 달리며 들어오는 사람. 그 사람의 인스타에는 가족사진이 아닌 해외출장 가서 먹은 맛있는 음식사진으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반면 나는 어떤가. 나는 회사에 다니면서 회사 일이 바빠도 야근이 불가능했고, 회사에서 회식을 해도 회식을 불가한 사람이었으며, 오후 6시 땡 치면 뻔뻔하게 회사 문을 열고 나와야 했다. 그 회사마저도 회사가 어려워져 계속 다닐 수가 없는 상황(퇴직 1순위)이 왔을 땐, 다른 업종을 찾아야 했다. 아이를 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지속해서 탐색해야 했다. 남편의 월급으로 어떻게든 살려면 살 수도 있었겠지만, 나의 경제력을 놓치기 싫었으며 남편의 돈으로 내 개인적인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단 몇 푼이라도 내 수중의 내 돈이 필요했다.      

악착같이 살았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나는 아이들을 양육하고 내 일 찾아 헤맸다. 지금도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남편의 입장에서는 나는 노는 사람인가 보다. ‘와이프는 편하게 일하지.’라는 마음이 강한 걸까? 아닌데. 결혼하고 끊임없는 양보 끝에 이 자리에 있다는 생각을 못 하는 남편이다.     


결혼해서도 여전히 자신을 먼저 챙기고 사는 사람. 여전히 ‘총각’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이 자유로운 영혼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으로 사는 것’ 너무 좋은 말이고, 요즘 한 참 떠드는 말이다. 그러나 ‘아빠’도 ‘남편’도 자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로 서는 것 안에는 존재 자체도 있지만 그 안에 나에게 주어진 역할도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와 똑같아지라는 말이 아니다. 최소한 곁에 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은 눈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집안 경제 돌아가는 사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만 살고 알 살 것인가.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자세한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해서 나에게 공감과 이해를 바라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고해 보길 바란다.      


언제까지 남편의 태도에 대해 ‘그럴 수 있지’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볼 수 있을까. 싸우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한다. 그의 힘들다는 말을 진심으로 받아주고 싶었고, 하고 싶은 걸 못 하고 살아봤다는 말에 하고 싶은 걸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점점 끊임없이 요구하는 그에게 나는 기운이 빠져버렸다.      

남편이 ‘혼자 해외여행 다녀오고 싶어.’라는 말에 나는 결혼 15년 동안 내가 했던 고생이 물거품이 되는 기분이었다.      


나도 남편처럼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사람이고,

나도 남편처럼 회식 자리에서 즐겁게 웃고 떠들 수 있는 사람이고,

나도 남편처럼 배우고 싶은 것 또한 많은 사람이다.      


나도 ‘나’로 살고 싶은 사람이다. 나로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나를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내 입장에서 바라보는 그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사람, 그런 얄미운 존재인데 왜 자꾸 내 마음을 후벼 파는지 모르겠다.      


‘얄미움’ 안에는 ‘나도 너처럼 편하게 일하고 싶고, 나도 너처럼 능력을 쌓고 싶고, 나도 너처럼 놀러 다니고 싶고, 나도 너처럼 배우고 싶은 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배우고 싶어.’라는 질투에 감정이 숨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 다른 생각이 들어왔다. ‘내가 아는 남편이 남편의 다일까? 지금 보여지는 게 다일까?’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그의 또 다른 생활이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책의 문장이 생각난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연민을 가져야 한다. 그들의 혼과 뼈와 만나는 저 안쪽에서 어떤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저마다의 가슴에는 있다.
(...)
왜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도 각자의 등에 붙어있는 투명 스티커를 알아보지 못한 채 성급히 판단하는가? 이를테면 이런 스티커들 말이다.   
‘일자리를 잃었어요.’
‘병과 싸우고 있어요.’
‘이혼으로 상처로 아파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어요.’
‘자존감이 바닥이에요.’
‘그저 껴안아 줄 사람이 필요해요.’
‘방세를 못 내고 있어요.’  
우리 모두는 보이지 않는 스티커를 등에 붙인 고독한 전사이다. 그 등은 어떤 책에도 담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지고 다닌다. 따라서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참고’ 친절해야 한다.


남편을 다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의 혼과 뼈와 만나는 저 안쪽에서 어떤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믿어주는 일과 지지해 주는 일이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과 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문제의 탓을 남편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내가 하나씩 해나가면 되는 일이다. 이건 그와 나에게 모두 필요한 태도이다.

    

나는 이제부터 그가 혼자 여행을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해외가 되었든, 국내가 되었든 말이다. 남편이 5월 쉬는 한 달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발돋움하길 바란다.    

  

말 한마디 던졌다가 나의 지랄 맞은 푸념을 온전히 받아내느라 고생한 남편, 미안하고 고마워.     

당신도 나도, 우리 서로 편하게 살자. 그게 사랑하며 사는 길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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