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계절, 권여선]
엄마, 우리 먹을 거 놓고 마음껏 싸우지도 못하게 된 건 뭐 땜에 그런 걸까?
음, 반희가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것도 물고기랑 같은 이유겠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세상 뭐 다 이렇게 슬픈 얘기야. 젠장. 채운이 맥주를 벌컥 마시고 말했다. 나는 원래 생겨먹은 데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 [각각의 계절, 권여선], <실버들 천만사> 73쪽 -
뇌는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
- [각각의 계절, 권여선], <실버들 천만사> 79쪽 -
이 다시 쓰기가 체념과 굴복이 포함되었던 모녀의 관계 및 두 사람 각각의 인생행로를 조금이라도 바꿔놓게 되리라고 이 소설은 예감하며 끝난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모녀의 대회 속에 나오는 생명체들의 신체 변형이 살아남기 위해 '적응의 결과'라고 수동적이라고 반응적인 것으로 풀어되었다가("세상 뭐 다 이렇게 슬픈 얘기야. 젠장. (......) 나는 원래 생겨먹은 데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훼손되었을까]", 73쪽) 그것이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진화의 과정'이라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것으로 재해석되는("뇌는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 79쪽) 다시 쓰기와도 호응한다.
- [각각의 계절, 권여선], <해설ㅣ영원회구의 노래, 권희철(문학평론가)> 260쪽 -
나는 원래 생겨먹은 데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원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지?
앞으로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나는 진화 하고 있는 걸까? 퇴화하고 있는 걸까?
요즘 생각이 많다.
가을이라 그럴까.
벌려놓은 일들이 많아서 그럴까.
무언가 눈으로 보는 성과가 없어서 그럴까.
아이들이 점점 내 손을 타지 않고,
남편은 일찍 퇴근해 성실한 가장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안정적인 생활이 익숙치 않아,
복에 겨워 이럴까.
이상하리만치 요즘 머리가 복잡하고
감정이 복잡미묘하다.
벌여놓은 일은 이제 끝이 보이고,
성과가 없어서
성과를 보이기 위해 시작한 일이니
힘들어도 꿋꿋이 해나가면 될 일이다.
아이들이 내 손을 타지 않는다는 건,
그동안 아이들과 잘 소통한 덕분이고,
아이들이 자립을 잘해 나가고 있다는 중이니
너무나 기쁨 소식이다.
남편이 일찍 퇴근해서 집안일을 함께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려고 하지만
내가 나의 일이 바빠 서로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도 꽤 많다.
어쩜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알 수 없는 선들이 보인다.
남편은 나에게 체념했다는 표현을 썼고,
나는 체념하지 말라고 했다.
체념을 안 하게 하기 위해선
나는 내가 하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할까?
다는 아니겠지만...
그러나 아이들이 자립하고,
남편이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때,
나도 나의 일을 하고 싶다.
남편은 내가 해 왔던 과정들에 대해서
모든 다 싫다고 했다고 하지만
남편은 긍정적인 부분을 보지 못하고
내가 했던 안 좋은 부분만을 기억해서
나를 몰아 붙인다.
처음 화사를 그만두는 과정부터
이직과
베이비시터
어린이집
다시 회사
지금의 노력을
나의 개인적인 일들로만 치부해버린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왜 그것을
인정받으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하고있다.
그러나 나는 인정받고 싶고,
나의 애씀에 대해 위로받고 싶다.
다른 누가 아닌,
가족인 남편에게.
다른 사람이 다 몰라줘도 된다.
옆에 있는 남편만이 어깨 토닥이며
잘했다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면 힘이 될 것 같다.
오히려 당연한 걸 해 놓고
왜 자꾸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냐는
그의 뉘앙스에 상처를 받는다.
그는 자신도 자기의 자리에서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그러니 너만이 아니라 나도 하고 있으니
그만 좀 하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 논리가 맞으면서도
맞지 않다.
그리고 이 논리가 맞든 맞지 않던
이걸로 언쟁한다고
해서 무엇이 해결되는 건 없다.
남편은 행복한 가정을 꿈꾼단다.
그 행복이란 서로 싸우지 않고 존중한다는 것.
그러나 그는
내가 바라는 인정을 해 줄
마음이 없다고 한다.
이게 존중일까?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떻게 진화해야 할까?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할까?
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진심이 아닌
머리가 시키는 행동을
AI처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건 나의 추측일 뿐이다.
이걸로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서로 피곤할 뿐이다.
그가 하는 말을 표면상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늘 팽팽하게 그어져 있는 선에
조금 지쳐간다.
그럼에도 그는 성실하게 책임감 있게
가족을 이끌어 가겠지.
그의 말처럼 욕심이 많은 걸까?
나는 성실과 책임 말고,
사랑도 필요한데 말이다.
혼자 더 이상
북 치고 장구 치고가 힘들어지는 요즘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어떻게 진화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