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같은 김을 무쳐도 이렇게 쫄깃하게 잘 무치는지, 감자를 조려도 이렇게 포슬포슬한 식감이 나게 조리는지 데레사가 감타하면 마리아는 별것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먹어줄 사람을 생각하고 만들면 그렇게 돼요, 사모님.
(중략)
먹어준다니요. 먹어줄 사람을 생각하고 만들면 그렇게 된다니요?
[각각의 계절, 권여선], <하늘 높이 아름답게>, 101쪽
나는 음식을 만들 때 어떤 생각을 하고 만들지? 특별히 무언가 생각했나?
아이들이 안 먹는 채소는 작게 다지거나 넣지 않는다. 메뉴를 선정할 때는 가족들이 좋아할 만한 거로 선택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내가 손쉽게 맛있게 할 수 있는가다. 이것도 먹는 사람, 아니 마리아의 말을 빌리자면 '먹어줄 사람'을 생각하고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없다고 본다.
남편은 요리할 때 질문이 많다. 메뉴 선정부터 질문에 들어간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로 시작된 질문은 메뉴가 정해지면 더 세세하게 들어간다. "이건 넣을까? 말까?", "작게 할까? 크게 할까?", "간은 이 정도 괜찮아?" 등 쉴 새 없이 질문한다. 남편의 쏟아지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싫은 내색을 했다. "어떻게 해주든 다 맛있게 잘 먹어. 당신 스타일대로 해."하며 더 이상 질문 받기를 거부했다.
남편은 나에게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늘 이렇게 묻고, 먹는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음식을 했다. 아이들이 의견이 분분해 서로 다른 스타일을 음식을 원할 때 남편은 아이들이 원하는 방식을 모두 했다.
밥이나 국을 풀 때도 마찬가지다. "얼마만큼 먹을 거야?", "국물은?", "건더기는?"하고 묻는다. 처음에는 이런 질문에 일일이 답변하기 귀찮았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질문하는 사람의 의도가 무엇일까 살폈고, 질문이 불편한 나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남편의 의도는 정말 상대방 맞춤을 위한, 마리아 같은 마음이었다. 질문이 불편한 나의 이유는 나도 정확히 모르는 것을 상대가 계속해서 질문하니 거기에 맞게 답하기 위해 생각을 해야 하므로 불편했던 것이다. 안 하던 사고였다. 자라면서 음식에 대해 질문을 받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차려진 밥상 앞에 가서 식사할 뿐이었다. (그래도 대부분 충분히 맛있었고, 만족스러운 밥상이었다.) 밥상뿐인가, 자라면서 내 의사를 묻는 말은 별로 들어보지 못했기에 자기 표현하는 게 익숙지 않았다. 정확히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 불편했던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린 순간부터는 남편의 질문에 최대한 신중하게 대답하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보며 생각한다. '너희는 다정하고 섬세한 아빠가 있어서 참 좋겠다고, 다행이라고.'
하나 더 보태 바람이 있다면, 남편이 마리아처럼 말하지 않아도 내 취향을 다 알아줬으면 좋겠다.
나는 욕심쟁이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