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문제냐 서울이 문제냐 한국이 문제냐 아니면 모더니티가 문제냐!
점심시간에 한강으로 뛰쳐나간지는 한 달 반 정도 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로 심화될 무렵부터였다. 평소 헬스장에서 하던 운동이라곤 유산소 운동이 고작인데 헬스장이 도무지 문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대신 한강을 달리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거무스름한 십 여 개의 이웃집 문들 사이에서 유난히 노란색의 무언가가가 눈에 띄었다. 몇 발자국의 걸음으로 금세 그 정체를 알 수 있게 되었는데 그건 시끄러우니 조용히 해 달라는, 스쳐 지나가듯이 보아도 화나는 감정이 티가 나는, 그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메모였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그 필체는 그다지 정갈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닌 형태로, 이 메모를 볼 상대에게 제발 읽히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시끄러움 때문에 화가 난 내 감정보다 이 메모를 읽을 상대의 기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해코지를 해 올 만큼의 증오는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간단한 문장들이었고 적당히 감정을 전달하려는 듯했다.
그런데 그 메모지에 남아 있는 작은 공간에 또 다른 글씨체가 있었다. 좁은 공간에 꼭 써넣고 말리라는 의지가 보이는 필체였다. 대충 이렇게 적혀있었다.
"저도 쿵쿵 거리는 소리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데요. 잘못 짚으신 것 같고 경비실에 연락하세요."
그 메모는 운동을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으며 잠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 자리에 있었다. 소음 때문에 메모를 붙인 이가 다시 돌아와서 그 메모를 볼 확률은 조금 낮을 것 같다. 아마 답장을 적은 이도 어렴풋이 알았을 것도 같다. 그런데 아무래도 억울하고 도무지 어디에다가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는지 불분명해서 그나마 속 편한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비슷한 경험이 있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 경비실을 통해 러닝머신을 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는 협조문이 붙었고 다음날 집을 나서면서 확인한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고 있던 시간이었기 때문에.... 나 또한 그것에 대해 억울했고 억울함을 푸는 방법은 '이상한 사람이네' 라며 협조문 붙이기를 요청한 누군가에게 전달되지 않을 분노를 표출하는 것과 경비실에 연락해 전 잤다구요 라며 하소연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타인에게 절대 한 톨의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자신할 순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발뒤꿈치가 코끼리보다 공격적이었을 수도 있다. (비록 그 사건 당시엔 내가 자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때엔 가능성이 있으니까) 오늘 내가 목격한 그 메모지의 수신자도 송신자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뒤꿈치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게 도대체 누구의 잘못일까.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불특정 다수에게 열이 받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특정하여 분노를 품게 된 거지? 벽 하나로 집을 나눈 집의 구조 때문에? 이렇게 건물을 지을 수밖에 없는 좁아터진 땅 덩어리 때문에? 소음에 시달려도 서울에 살아야 뭔가 될 것 같은 사회 구조 때문에? 서울에 이렇게 모여 사는 이유는 뭐 때문이었지? 우리나라가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서 그랬던가. 사실 소음 문제는 위층 아래층 옆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일어나는 일 아닌가? 그러면 그냥 도시가 생겨난 근대성부터 문제인 건가....
수많은 견딜 것들 중에 소리도 있다. 소리마저 견뎌야 한다. 왜 우리는 소음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해당 브런치북(과 글들은) 수정을 거쳐 <6.5평 월세방을 짝사랑하는 일>로 독립출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