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줄 아는 것을 버려라
학교를 모두 마치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까 막막해졌다. 그토록 기다렸던 졸업이었는데, 막상 졸업도 하고 학교에서도 멀어지게 되니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이 묘연해졌다. 사실 졸업하기 전에 다음 스텝을 준비하고 나왔어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 지도 교수님께서 병 중에 계셨고, 나도 아이가 더 크면 영영 졸업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후를 생각하지 않고 졸업부터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졸업을 했는데 정말로 별다른 수는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 수를 내가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이것 저것 생각해 보았다. 그 동안 학교에서 배워온 커뮤니케이션 전공 지식, 여러 분야에서 보고 들으면서 배운 글쓰기 능력, 대학원에서 익힌 학술 능력, 유학 가려고 배웠던 영어, 다년간 강단에 서서 익힌 강의 능력, 사회 조사 및 통계, PPT작성 능력… 그밖에도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많은 능력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할 줄 아는 것이 많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것보다는 좋겠지만, 많은 능력이 있다고 해서 바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많은 능력을 발휘한 훌륭한 아줌마로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것을 원하는가. 집안에만 머물러서 그 능력을 집안 일을 하는데 쏟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가. 이 질문을 던지면, 나는 여지없이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와 같이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엄마들이 주변에 꽤 있다.
한 번은 구청에서 열렸던 강사 인큐베이팅 과정에 수업을 들어간 적이 있었다. 이 수업에 들어오셨던 분들은 교육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을 해보고 싶어했다. 수업 중에 교육자로서의 가치 탐색을 하면서 그동안 배웠던 것을 되돌아 보는 활동을 하였는데, 다들 참으로 배운 것이 많았다. 요즘에는 이렇게 평생교육 기관에서 무료 교육을 많이 열어주기도 하고, 인터넷을 보면 여러 교육 기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어서 배우려는 의지만 있다면 어디서든 뭐든 배울 수 가 있다. 그래서 이것저것 다 챙겨서 배워왔던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동안 이것저것 배운 것이 너무 많아서, 자신이 어떤 것을 가르칠 것인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수업에서 중점을 둔 것이 ‘초점화’였다. 무언가 더 배우려고 하지 말고, 배운 것을 덜어내라는 것을 가르치는 수업이었던 것이다.
내가 만났던 어떤 엄마는 자격증을 골고루 따려고 하기도 했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서 뭐라도 해 봐야 하고, 가정경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격증을 수집하러 다녔다. 그 종류도 참으로 다양했다. 국내에 그렇게 자격증의 종류가 다양한 지도 그 때 알았다. 그런데 그 자격증으로 무얼 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혹시나 몰라서,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니까 따 놓는 것이라고 했다.
이쯤 되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재다능한 것이 좋은 것일까?
텔레비전에 나오는 천재들을 보면, 여러가지를 다 잘하지 않는다. 그림 천재는 그림을 잘 그리고, 수학 천재는 수학 문제를 잘 풀고, 기타 천재는 기타를 잘 치고, 언어 천재는 외국어를 잘 한다. 이 천재들이 자동차도 만들 줄 알고, 설거지도 잘하고, 물품정리도 잘 하지는 않았다. 어떤 천재는 러시아어를 정말 잘하는데, 길을 전혀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재능으로 빛을 보려면, 너무 많은 흥미와 관심에서 더 나아가서, 어느 정도 한계선을 뛰어 넘은 수준 높은 능력을 한 개 혹은 두 개 정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
특히 아줌마들은 하는 일이 워낙 많아서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요리를 해도 한, 중, 일식을 다 하고, 베이킹도 좀 하고, 디저트도 좀 만드는 등 여러가지를 한다. 인터넷 쇼핑도 엄청 잘하고, 아이옷, 남편옷, 자기 옷을 고르는 것도 잘한다. 각종 공과금 납부, 은행 업무, 보험 계약을 비롯한 여러 행정 업무에도 능하다. 여유가 있는 엄마들은 그림이나 악기를 배우기도 하고, 요가나 헬쓰 등 운동도 몇 개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할 줄 아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무언가 만들어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어느 정도 수준으로 오를 정도로 체계화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체계적으로 만들어 놓으려면 시간이나 노력이 꽤 들어서, 이것저것 할만한 여력이 없다. 반대로 말하면, 무언가 제대로 된 실력을 키우려면, 여러 종류를 다 하려는 생각을 가지치기 하고 자신이 계속 해낼 수 있는 몇 가지를 골라야 한다.
그 몇 가지를 어떻게 고를 수 있을까. 젊은 나이라면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을 다 해보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20대 때에 진로를 정하려고 하지 않고, 경험 할 수 있는 것이면 나에게 다가온 모든 일을 겪어보려고 했다. 할까 말까 고민이 될 때, 항상 하자는 쪽을 선택해서 다 해보았다. 그래서 몸 고생, 마음 고생이 많았지만, 내가 무엇을 하기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난 삼십 대에는 할 수 있는 경험의 폭도 좁아지고, 할 여력도 많이 생기지 않는다. 제약 조건이 너무 많아져서 다양한 경험을 모두 해볼 수가 없다. 이럴 때에는 약간의 전략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요즘에는 진로개발 프로그램이 잘 마련이 되어 있다. 성격이나 성향 검사, 직업 적합성 검사 등이 개발되어 있어서 한 번 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그 동안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살아온 방향성과 해 온 일을 살펴보는 일이다. 막연하게 돌아봐서는 안 되고 자신의 강점과 가지고 있는 자원을 중심에 놓고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미래이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의 작업을 잘 해낼 수 있다면, 앞으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그려질 것이다. 이 과정은 꿈버클럽에서 진행되고 있다.
나의 경우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 거의 글을 쓰는 쪽에서 놀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부터 글로 밥벌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글과 관련된 공부를 하고, 글과 관련된 일을 쭉 해왔다. 영상 대본, 신문잡지 기사, 연구보고서, 학술 논문 등 비문학 분야의 글은 모두 써서 돈을 벌어 본 적이 있다.
멋진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이렇다. 아름다운 풍경이 내다 보이는 곳에, 나에게 오로지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동시에 세계 어디에 있든 작업을 할 수 있고, 이것을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멋진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가르침과 영감을 받고, 서로를 지지해줄 수 있는 단단한 사람들을 곁에 두는 것이다. 항상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좋은 변화를 곁에서 보면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서슴없이 나를 표현하면서 살면 참으로 재미있을 것 같다.
이러한 삶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 이 책을 쓰고 있는 것도 나의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과정이다. 낮에 아이들 돌보고 새벽까지 글을 쓰면 체력이 방전되서 힘들다. 하지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하는 과정이기에, 힘들지만 지속할 수가 있다.
그 대신 이것을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할 수 있는 것을 다 포기했다. 아이를 키우는 제약 속에 있는 것이 오히려 나에겐 도움이 된 면도 있다. 관심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 내가 아이 때문에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정말로 필요한 것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버리게 되었다. 다 버리고 나니, 오히려 한 가지를 쭉 할 수 있는 힘과 여력이 생겼다. 너무 많은 능력을 사방에 걸쳐 놓지 말고, 아깝더라도 그저그런 정도로 할 줄 아는 것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몇 가지 필요한 능력을 선별해서 지속해서 실제로 세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일로 바꾸는 일이 진짜 능력을 키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