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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잔 Jan 14. 2021

반짝이는 벽돌처럼, 정세랑

<피프티 피플>과 <보건교사 안은영>

모든 게 잔치국수 먹듯 후루룩 이루어진 날이었습니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보건교사 안은영> 시리즈 예고편이 알록달록했고, 새로 나온 <보건교사 안은영> 리커버 표지 일러스트는 너무 예뻤고, 그날은 제 월급날이었고, 마침 도서 5만 원 이상 구매하면 살 수 있는 교보문고 창립 40주년 기념 머그컵이 아직 품절 전이었어요. 거기에 한동안 책과 담쌓았던 저의 게으름이 더해져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정세랑 유니버스를 여행하기에 좋은 한 주였습니다.



우선 보라색을 좋아하니까, 벨벳 같은 독특한 질감의 표지를 가진 장편 소설집 <피프티 피플>을 펼쳤습니다. <피프티 피플>은 말 그대로 50명의 주인공을 가진 장편소설입니다. 책은 누군가의 이야기, 그 이야기 속 다른 등장인물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벌어진 장소에 있었던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의사, 응급환자, 시인, 타투이스트, 대학생… 다양한 인물이 저마다 너덧 장 분량의 삶의 조각들로 이어져 한 권의 장편이 됩니다. 그들은 서로의 이야기에서 지나가는 시민 1로, 청자로, 조력자로 존재합니다. 그 느슨한 듯 촘촘한 관계망 위에서 때론 즐겁고 때론 비통한 일상이 끝내 무너지지 않고 지탱됩니다. 한 번에 오십 명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은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새로운 챕터에서 지난 주인공들의 족적을 발견할 때마다 반가워하며, 틈틈이 머릿속으로 인물관계도를 그려가며 읽었어요. 저는 그중에서도 양혜련과 진선미, 김한나, 하계범과 이호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인물 당 다섯 장 남짓밖에 안 되는 이야기를 스포하고 싶지 않으니 설명은 생략할게요.) <피프티 피플> 속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건드리는 인물은 누구일지 궁금하네요.



그다음에는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 공개일(9월 25일)이 다가왔으므로, 책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었습니다. 그는 초능력자입니다. 사실 보건교사라는 직업이나 안은영이라는 이름이나 초능력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본인도 세상을 구하는 데까지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그는 그저 비비탄 총과 장난감 칼로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젤리’들을 제거하며 매일 남몰래 학교와 학생들을 지키는 선생님이죠. 안은영은 여느 히어로답게 훌륭한 조력자(손을 잡으면 에너지가 충전되는 신묘한 기운의 한문교사 홍인표)를 데리고 다니지만 다른 히어로처럼 대단한 신념이나 비전을 전시하진 않습니다. 그저 철창을 오르는 아이들의 뒤통수를 때려 떨어뜨리고, 비행을 일삼는 아이들의 겨드랑이털에 남몰래 매듭을 만들고, 수백 년 동안 남의 재수를 지켜주느라 위장병이 난 아이의 손을 잡고 병원에 갈 뿐입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구석에서, 알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만한 일에 혼을 쏟는 안은영.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이런 작고 평범한 친절로 인해 구원받는 법입니다. 처음엔 나한테도 안은영 같은 보건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읽고 나면 나도 누군가의 안은영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책을 보면서 상상만 하던 '젤리'가 멋지게 구현된, 책과는 또 다른 맛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보건교사 안은영>

               

지금은 <시선으로부터,>를 읽고 있습니다.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이자 쉽지 않은 엄마, 멋진 할머니였던 심시선으로부터 뻗어져 나온 가계도 속에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이 심시선의 10주기를 맞아 하와이로 특별 제사 여행을 떠나는 내용입니다. 책은 심시선의 생전 말과 글들, 그리고 심시선의 딸 아들 손주들의 하와이 여행기를 가로지르며 심시선과 인물들의 조각을 하나씩 맞춰 나갑니다.


정세랑 작가의 책 세 권을 내리읽으며 작가의 글을 이미지로 옮긴다면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정세랑 작가의 글은 햇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보도블록으로 만든 산책길 같아요. 가까이 봤을 땐 이리저리 구르고 밟혀 상처 입은 돌일지라도 저마다 반짝이는 구석들이 숨어 있어서, 그들이 가지런히 모여 있는 걸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답게 빛나는 풍경이 됩니다. 매일 밤이 찾아오고 가끔은 비도 내리겠지만 기다리면 약속처럼 다시 해가 뜨고 길은 눈부시게 반짝이겠죠. 기왕 걷는다면 그런 길을 오래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정세랑 작가를 더 알고 싶다면? 연필✏️이 소개해준 잡지 <글리프 1호 : 정세랑 월드> 보기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재탄생한 <보건교사 안은영> 예고편 보러 가기




이 글은 2020년 10월 1일 틈틈이 뉴스레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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