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언리미티드 에디션 #UE12 에서 발견한 반짝이는 독립출판물 두 권을 소개할게요.
첫 번째 책은 손민지 작가의 러닝 일지 <Pace>입니다. 달리기가 마음 다스리기에 그렇게 좋다는데… 직접 나가서 달리는 데까지는 닿지 못하고 우선 달리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로 하고 구매했습니다. 책의 왼쪽은 달리는 여자의 그림, 오른쪽은 한 장 분량의 일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달리기를 시도해 볼까 마음먹은 순간부터 달리기가 삶의 일부가 되기까지 몸과 마음의 변화가 솔직하고 담담하게 담겨 있습니다. 첫 장에서는 1분 달리고 2분 걷고를 반복하던 작가가, 얇은 책의 끝에 다다라서는 30분을 안 쉬고 달리는 러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이엔 2017년 여름부터 2019년 여름까지, 몇 주 또는 몇 달에 한 번씩 꾸준히 기록해 온 작가의 생각들이 담겨 있습니다.
모두 이 책을 보신다면 두 번은 펼쳐보게 되실 거예요. 책 왼쪽에 매 장 조금씩 다른 그림체로 달리는 사람이 그려져 있거든요. 무릎의 손상을 최소화하는 자세로, 과하지 않게, 하지만 진지하게 달리는 러너의 모습. 책을 다 읽고 나서 페이지를 차르륵 넘겨 그가 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단출하지만 보다 보면 왠지 자세를 고쳐 앉게 되는, 조용하면서도 강한 에너지가 담긴 움직임이었습니다.
<나의 꽃은 가깝고 낯설다>는 박혜란 번역가가 직접 고르고 번역해 완성한 에밀리 디킨슨 시선집입니다. 왼쪽에는 원문이, 오른쪽에는 번역본이 실려 있습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 홈페이지를 유영하다 표지와 제목에 마음을 뺏겨 구매했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어려웠습니다. 시를 음미하기보다도 지금 무슨 이야기가 이뤄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영어 원문을 여러 차례 읽어야 했어요. 그러다 출근길에 여러 번 졸았고, 읽으면서 글의 분량과 난이도는 정비례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죠.
그 와중에 한 가지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은 에밀리 디킨슨을 향한 작가의 애정이었습니다. 번역본의 줄 바꿈에서, 선택한 단어의 개수와 모양에서 작가가 원문을 얼마나 그대로 보존하고 전달하고 싶었는지 느껴졌습니다. 꼼꼼히 읽고 잘 이해해내고 싶은 글이었어요. 덕분에 여러 번 검색하면서 에밀리 디킨슨에 대해 새롭게 많이 배웠어요. 그는 자연과 꽃을 사랑했고, 평생 1700여 편의 시를 썼지만 생전에 공개한 건 7편 밖에 없는 지독한 은둔자였고, 시는 대부분 종이 조각에 제목도 없이 쓴 것이었다고 해요. (그리고 20세기 들어서야 인정받은 실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스타일 때문에 번역이 쉽지 않다고 해요. 제가 완전 바보는 아니었나 봐요. 하하~)
책장을 덮으며 이런 게 독립 출판물의 매력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보통 책은 후기까지 꼼꼼히 찾아 읽고 고를 때가 많은데, 독립 출판물은 한 줄 책 소개를 읽고 고르거나, 아니면 그냥 표지만 보고 느낌대로 골라 읽곤 해요. 이 책도 그저 ‘나의 꽃은 가깝고 낯설다’라는 문장에 홀려 구매했어요. 그날의 그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도 에밀리 디킨슨을 모르며 살고 있을 테죠. 이 책은 동봉된 꽃무늬 책갈피와 함께 고이 덮어 책장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옛날 데미안과 토지가 그랬듯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 보면 마법처럼 문장들이 이해될 날을 기다리며.
이 글은 2020년 10월 15일 틈틈이 뉴스레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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