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겼다는데 입이 나와있다.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중학생 아들은 최근 몇 주간 거의 매일 힘들어 보였다. 반 대항 축구 경기가 한창인데, 그게 아들의 저기압의 원인이다. 경기에서 지는 날이면 반 아이들끼리 얼굴을 붉히며 서로를 탓하느라 마음이 상하고, 이기는 날엔 진 팀을 놀리다가 혼난단다. 지면 지는 대로 마음이 상하고, 이겨도 좋지만은 않다. 그러니 경기가 있는 날은 먹구름 잔뜩 낀 얼굴이다. 그런 아이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깎던 사과에 정성을 기울여 본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기하(가명)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땐 남학생이면 무조건 축구클럽에 가입하는 분위기였다. 1학년 때 결성된 축구멤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첫째는 매주 있는 축구 수업을 기다리고 즐겼다. 기하도 그러길 바랐다.
축구 수업에 처음으로 엄마들이 참관한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기하는 골키퍼다. 친구들은 넓디넓은 운동장을 공을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분주했다. 기하는 골대의 귀퉁이에 서 있었다. 뭔가를 하고 있는데 거리가 멀어서 알 수가 없었다. 축구장 둘레를 따라 골대 가까이 다가갔다. 기하는 그물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상대편 아이가 거침없이 공을 몰며 골대를 향해 돌진했다.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기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할 수만 있다면 우사인 볼트(100m 세계 신기록 선수)처럼 달려가 공을 막아주고 싶었다. 그 대신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공, 공, 공.”
내 목소리보다 공의 속도가 빨랐다. 기하가 고개를 돌렸을 땐 축구공이 날아와 정중앙에 꽂히며 골 망을 흔든 뒤였다.
이미지 출처 Pixabay
기하는 친구랑 노는 것도 좋아하지만 혼자서도 잘 놀았다. 아기 때는 움직임 없이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있으니 키우기 수월하겠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 그때는 아이의 장점을 볼 겨를이 없었다. 그저 내 마음에 안 드니 비아냥 거리는 소리로 들렸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라’
두세 번 이면 괜찮겠다. 아니 다섯 번도 기다릴 수 있다. 기하는 돌다리를 열 번이나 두드리고도 건널지 말지 고민한다. 학교를 가게 되면서 노심초사하게 됐다. 점심때 밥은 제시간에 먹는지 모둠 활동을 하며 친구들이 답답해하는 건 아닌지 말이다.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이 있던 날, 메모를 잔뜩 했다. 하지만 걱정으로 가득한 메모지는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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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 전해 들은 기하의 학교 생활은 이러했다. 모둠 활동 할 때 서로 먼저 하겠다는 친구들에겐 양보하고 본인처럼 내향적인 친구를 위해선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고. 요즘처럼 경쟁이 심한 시대에 상대방의 마음을 살피고 헤아리는 학생은 드물다며 칭찬 일색. 반 아이들이 서로 짝꿍을 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라고 했다. 집에서도 배려심이 많은 아들이다.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를 먹을 때조차 형과 부모님이 먼저라며 입어 넣어준다. 자주 있는 일이니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축구든 농구든 시키는 운동마다 꺼려했던 기하는 유독 스키를 좋아한다. 스키가 왜 그렇게 재밌는지 궁금했다.
“이기고 지는 사람도 없고.
함께 내려오고 리프트로 나란히 올라가니까 얼마나 좋아.”
남들 다 한다고 아이의 성향에도 맞지 않는 운동을 억지로 시켰던 엄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축구나 농구처럼 몸싸움이 거칠고 상대방을 이겨야만 하는 운동을 피했던 것이다. 다행히 해야 할 말은 하는 단단한 아이라서 시도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양옆을 가리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같은 나를 멈춰 세웠다. 아이는 제 속도와 방향으로 잘 가고 있다. 나만 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