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1학년과 함께 읽은 그림책
"선생님, 지금 제가 딱 회색빛이에요."
"무슨 일 있나요?"
"영어학원을 옮기는 날이에요. 다니던 학원이 재밌었는데, 엄마가 끊고 새 영어학원을 알아봤어요. 친구도 없고 선생님도 무서울 것 같고. 가기 싫어요."
"엄마께서 윤아를 위해 잘 알아보셨을 거예요. 친구들도 생길 거고 선생님도 더 좋은 분이실 거예요."
머릿속을 마구 뒤져서 나온 말들로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은데 윤아의 낯빛을 보아하니 도움이 되는 게 맞나 의심스럽다.
그림책 속 주인공의 마음에 이입되어 페이지를 몇 장을 넘기지도 않았는데 손을 번쩍 들고 곧 닥쳐올 일들을 좌르륵 쏟아낸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복잡 미묘했던 윤아가 편안해 보였다. 그림책에 위로를 받았겠지.
그림책 <오늘은 회색빛>은 2024 워터스톤즈(유럽에서 가장 큰 서점)에서 꼭 읽어야 할 아동도서로 선정했다. 심리 교육분야 전문가들도 찬사를 쏟아내며 칭찬하는 책이다. 재미보단 의도가 있기 때문에 아이가 혼자 읽기보단 어른과 함께 읽을 때 그 의미가 더 잘 전달된다.
그림책 주인공은 회색빛이다.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는 눈에 보이는 색과 그림으로 마음을 알아챌 수 있다. 노란 햇빛, 주황색 풍선, 초로빛 나무들 하지만 주인공은 회색이다. 새까만 밤하늘 같이 울적하단다.
회색빛이어도 괜찮아.
날마다 밝을 필요는 없거든.
윤아의 마음도 나의 마음도 어루만져 준다.
사실, 집을 나서며 답답했다. 읽고 싶던 책도 쌓여있어서 좋았지만 현실엔 부지런히 해야 할 집안일이 쌓여있어서 그것 먼저 처리하느라 책은 한 글자도 못 읽었다.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하며 나도 더 많이 읽게 된다. 좋은 것들을 전달해주고 싶은데 욕심일 뿐인가 싶어 회색빛이 되었다. 그런 마음으로 들어선 교실에서 나처럼 회색빛인 학생을 만나고 그림책을 읽으며 같이 위로받았다. 학원에 간다는 윤아를 꼭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누른 체.(학교에서의 성폭력 지침으로 머리를 쓰다듬거나 하는 터치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다음에 읽을 좋은 그림책을 사냥하러 서점으로 향한다. 백화점과 같이 있는 서점은 도달하기까지 꽤 많은 유혹을 견뎌야 한다. 지하 1층의 음식코너의 1+1 외침이 오디세우를 유혹했던 사이렌 소리 같다.
오늘은 목표물만을 위해 돌진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