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 시간, 그녀가 옆에 앉아 오랜 친구처럼 첫마디를 건넸다.
“선생님, SF 영화 좋아하세요? 전 에일리언 시리즈는 다 봤어요.”
“좋아하긴 하지만 그 시리즈는 좀…” 하자, 그녀가 바로 말했다.
“그렇다면 <컨택트>는 좋아하실 거예요.”
같은 학교에 있었지만, 그녀는 내 관심 밖의 사람이었다. 수업 시간마다 복도까지 울려 퍼지는 큰 목소리와 넘치는 에너지가 인상적이었다.
‘참 열정적인 사람이네.’
나는 몇 걸음 떨어져 조용히 지켜보는 쪽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 검은 티셔츠, 화장기 없는 맨 얼굴. 단순한 듯하지만 묘하게 잘 어울렸다.
글을 쓰다 교사가 됐다고, 그것도 드라마를. 그리고 SF 영화 에일리언 시리즈를 좋아한다니. 도대체 어디서 이런 사람이 나타난 걸까.
그땐 직장이 숨 막히게 답답했다. 비슷한 배경, 같은 대학 출신, 복사한 듯한 하루 일과. 회의와 연수, 끝없는 민원 대응. 하루하루가 지겨울 만큼 똑같이 반복됐다.
그런데 이 친구는 달랐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속 외계인 같았다. 완전히 다른 리듬으로 사는 사람. 잠시 지구에 들른 듯한 자유로운 분위기.
그녀는 학교가 좋다고 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기간제를 시작했지만,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수업 준비, 교실 풍경이 자신을 살아 있게 만든다고 했다. 그러더니 불쑥,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요.”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거짓 없이 건넨 칭찬을 들은 건 참 오랜만이었다. 그녀 눈엔 내가 학급을 능숙하게 이끄는 경력 교사처럼 보였나 보다. 하지만 속으론 학교를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에 조금 민망했다. 어쩌면 교사로서는 나보다 그녀가 훨씬 적합해 보였다.
그녀가 추천한 영화 <컨택트>. 큰 기대는 없었다. 기묘한 낙지 모양의 외계 생명체가 원형의 기호를 그리는 장면에서 ‘그만 볼까’ 싶었지만, 그것이 언어이자 문자라는 걸 알자, 그 낯선 기호가 무엇을 뜻하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언어학자인 주인공이 그것을 해독하는 순간, 과거와 미래가 한꺼번에 펼쳐졌다. 쓰는 문자가 사고와 삶까지 바꾼다고?
시간은 늘 앞으로 흐르고, 문장은 마침표를 향해 가야 한다고 배웠다. 미래를 계획하고, 오늘 할 일을 마쳐야 내일이 안심되는 삶. 그런데 영화 속 원형의 언어는 그 익숙한 틀에 금을 내고, 시간을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했다.
그녀는 책을 좋아하고, 혼자 세계 여행도 다녔으며, 가끔 글을 쓴다고 했다. 나는 주로 듣는 쪽이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늘 흥미로웠다. 유연한 사고에서 나오는 말, 돌려 말하지 않는 솔직함이 좋았다. 겉만 봐선 털털해 보였지만, 오래 만날수록 속이 단단히 여문 사람이었다. 학교라는 익숙한 공간에서만 살아온 나에게, 그녀는 낯설지만 매력적인 존재였다.
얼마 전,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조만간 꼭 찾아갈게요.”
퇴직 후 내 생활이 궁금하다며 이것저것 물었다. 돌직구 같은 질문이 이어졌지만, 하나도 당황스럽지 않다. 여전히 진심을 숨기지 않는 사람. 그래서 편하다.
‘천천히 산다는 게 어떤 느낌이에요?’
그녀가 다시 묻는다면, 이제는 조금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나는 시간을 계획하지 않는다. 해가 길어지면 더 앉아 있고, 책을 읽다 전화가 오면 길을 나선다. 양가 부모님 집에 가고, 고양이 밥을 챙기느라 유럽 여행 대신 집에 머문다. 또 길고양이 동글이가 며칠째 보이지 않아도, 하루키의 『1Q84』 3권 중 제2권이 비어 있어도 서둘러 찾지 않는다. 언젠가 돌아올 거라 믿는다.
천천히 산다는 건, 그런 선택이 가능해지는 순간들이다. 적어도 세상엔 직선만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
*사진 출처: 영화 《컨택트(Arrival)》,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감독,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