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 이름은 열이다.
한때는 스쳐 지나가는 존재였다. 곁에 있어도, 어느 날 보이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인연이라는 끈은 그 아이를 내 곁에 묶어두고,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했다.
아주 쪼그만 녀석이 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열이야’ 하고 부른 그 순간부터, 외면할 수 없었다. 요즘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 아이를 떠올리며 지낸다.
그날 여름, 부엌 옆 낡은 가구 틈에서 이상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병아리처럼 끊임없이 울어대는 소리는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간절하게 울까. 숨이 끊어질 듯 다급한 소리를 따라가 보니, 거기엔 한 마리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
열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몸은 주먹만 했고, 이제 막 털이 솟기 시작한 참이었다. 옆에 있던 형제 셋은 잽싸게 도망쳤지만, 그 아이는 떨며 애타게 울고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아이를 안았다. 겨우 붙어 있는 생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야생성을 지닌 길고양이 ‘검치’가 새끼를 낳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는 녀석이라, 일부러 찾지 않았다. 어딘가에 보금자리를 숨겨두었으리라 짐작했을 뿐이다. 형제들은 이미 스스로 움직일 만큼 자라 있었지만, 이 아이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무녀리야. 제일 먼저 태어나서 약하든지, 제대로 못 먹었겠지.” 남편이 말했다. 그 말을 듣자 괜히 더 짠해졌다. 나는 조심스레 그 아이에게 이름을 붙였다. ‘열아.’
이름을 붙이는 순간, 마음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때도 아이는 힘없이 바둥거렸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 작은 몸은 벌써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곧장 시내로 달려가 고양이 분유와 작은 젖꼭지를 사 왔다. 아이들을 분유로 키운 경험도 있으니까. 열이도 곧 회복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열이는 젖꼭지를 물 줄 몰랐다. 입은 벌렸지만 빨지 못했고, 분유는 턱 밑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아이를 품에 안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 방울씩 분유를 흘려 넣자, 아이는 억지로나마 삼켜냈다. 응급실에서 밤새 뒤척이던 둘째가 떠올랐다. 그때처럼 조마조마했다. 지금 내 품에 있는 이 여린 생명이,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작은 생명의 무게가 새삼 묵직하게 다가왔다.
겨우 다섯 방울쯤이었을까. 입에 넣고 오물거리기만 해도, 몸에 온기가 돌았다. 품에 안고 꼬물대는 작은 생명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숨을 돌리자, 고양이 특유의 골골거림이 작게 들렸다. '살아나고 있구나. 제발, 버텨 줘.'
어릴 적, 동물을 좋아했다. 동물원에 가본 적은 없지만, 매주 ‘동물의 왕국’을 보며 조용히 관찰하고, 아플 땐 돌봐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막연히 동물학자가 되겠다고 했다. 다른 삶을 살아왔고, 동물과는 멀리 지냈지만, 그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던 모양이다. 요즘도 동물 관련 책을 자주 읽는다.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열이를 향한 감정은 단순한 연민이 아니었다는 걸.
“동굴 벽화의 소재들은 대부분 동물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동물을 관찰했지만, 그 이면에는 생명 자체에 대한 애착이 숨어 있다. 하버드대학교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의 본성 안에 생명에 대한 사랑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가까이서 오래 바라보면, 동물도 사랑하게 된다. 지켜주고 싶고, 곁에 두고 싶어진다. 그런 마음은, 어쩌면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키울 생각은 없었다. 시골집을 지켜줄 존재쯤으로 여겼다. 쥐나 뱀을 막아주는 자연스러운 동거. 밥만 챙겨주면 스스로 살아가겠지. 적당한 거리에서 지내는 관계였다. 사료를 놓으며 고마움을 표현하긴 했지만, 쓰다듬고 껴안는 애정은 바라지 않았다. 야생성을 잃지 않은 그들도,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열이는 그 질서를 바꿔놓았다. 아니, 그보다 내가 먼저 바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도착하는 소리만 들려도 마당 끝에서 뒤뚱거리며 달려오는 열이. 그 귀여운 몸짓은, 퇴근한 나를 향해 달려오던 아이들 같았다. 물론, 진짜 이유는 먹이를 달라고 따라오는 것이겠지만, 나는 괜히 엄마 기분을 내며 즐거워한다. 하루만 비워도 그 장면이 떠올라 괜히 안절부절못한다. 어디 다친 데는 없을까, 누가 해코지하진 않았을까. 때아닌 헬리콥터 맘처럼 걱정을 사서 한다.
결국 한 달 전부터 예약해 둔 2박 3일 여행도 미뤘다. 겨우 하루 이틀인데, 집을 비우는 게 왜 이렇게 신경 쓰일까. 처음엔 단지 시골집을 지켜주길 바랐는데, 지금은 열이가 없는 집이 허전할 것만 같다.
이름을 짓는다는 건, 누군가를 내 삶 안으로 들이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그 순간부터 책임감이 따라붙었다. 다른 형제들과 어울릴 수 있을 때까지만, 삼촌과 이모 고양이들처럼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만 함께하자고 마음먹었다.
어미 ‘검치’도 잠시 맡아 키우겠다는 내 다짐을 알고 있는 듯하다. 걱정 말라는 내 눈빛을 읽는 건지, 경계심은 놓지 않으면서도 천천히 다가올 때가 있다. 괜히 남의 자식까지 챙기려 드는 건 아닌가 싶어, 머쓱해진다.
‘열이야’ 하고 부르는 내 목소리는, 나도 모르게 더 다정하고 더 부드러워진다.
이름 하나가, 이 집도 나도 바꿔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