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가 아니라, 함께 마실 사람이 그리운 날이다. 그 사실이 문득, 마음을 허전하게 만든다.
30년을 산 도시를 떠나,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로 이사했다. 행정복지센터에서 주소를 바꾸는데도, 아무 감정이 일지 않았다. 이제 이곳이 내 거주지라는 사실만, 뒤늦게 실감 났다.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어쩌면 그 공허함이, 내가 이곳에 낯설다는 걸 가장 먼저 느끼게 했는지도 모른다.
단골가게만 찾던 나는 병원도, 마트도, 미용실도 새로 찾아야 했다. 익숙했던 일상이 흔들리자, 예상보다 훨씬 더 불편했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치과였다. 25년 정도 다닌 곳. 내 치아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원장님과 실장님의 다정한 상담은 이제 없다. 아프지 않도록, 당분간은 건강 관리를 더 철저히 하기로 했다.
이곳에서 내가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나가는 곳은,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독서모임이다. 정보 하나 없이 찾아간 첫날, 나는 그들 사이에 완전히 낯선 사람이었다. 오래 알고 지낸 듯한 그들 사이에서, 말 한마디 건네기도 조심스러웠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이 모임은 원래 새로운 회원을 받지 않는 곳이었다. 책이 좋아 무작정 들어갔지만, 아무도 바라지 않았던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에서, 나는 이미 그들 사이에 자리가 없다는 걸 느꼈다. 소개하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눈빛엔 조심스러운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당연했다. 그들에겐 나 역시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니까.
머리는 받아들였지만, 몸은 어딘가 불편해했다. 막상 부딪혀보니,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 얼마나 컸는지 알 것 같았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괜히 왔나 싶었다. 이 나이에 뭘 바란다고, 굳이 편한 곳을 떠났을까.
이번 달 독서모임 책으로 줌파 라히리의 『로마 이야기』를 읽었다. 처음엔 로마의 역사나 문화를 다룬 책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첫 장을 펼치자마자,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 로마라는 도시에 이주해 온 이방인들의 이야기. 찬란한 도시의 겉모습 뒤에는, 결코 쉽지 않은 삶이 있었다.
읽다 보니 자꾸 마음에 걸리는 문장들이 있었다. 내가 다른 나라로 이주한 것도, 낯선 언어를 배운 것도 아니지만, 그들이 겪는 막막함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아프게 다가온 장면은, 한 미망인이 받은 쪽지였다.
“네가 싫어. 너희 나라로 돌아가.”
짧고 날 선 문장이, 그가 견뎌온 시간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그 말은 단지 한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방인을 향한 시선이었다. 나를 향한 말이 아니었는데도, 그 절망이 그대로 전해졌다.
줌파 라히리는 벵골 출신 부모 아래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다. 영문학자이자 작가로 이름을 알렸지만, 어느 날 그는 로마로 향했다. 그곳에서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아예 그 언어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벵골도 런던도 뉴욕도 아닌 로마를 선택한 그의 결정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놀랍고 대단했다.
그는 등장인물의 시련과 상처를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로마 사람들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시선을, 그대로 드러냈을 뿐이다. 로마의 골목과 레스토랑, 아파트 계단, 그리고 아이들이 뛰노는 운동장 같은 도시 곳곳에, 그런 시선이 스며 있었다. 그는 언어를 배우고 책을 쓸 만큼 로마를 사랑했지만, 사랑만으로는 감출 수 없는 차가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몇 해 전, 로마를 여행한 적이 있다. 가장 가고 싶었던 나라, 가장 보고 싶었던 도시. 가족과 함께한 여행이었다. 마조레 성당 근처에 머물며 매일 골목을 걸었다. 두 번이나 찾았던 콜로세움보다, 매일 오가던 골목길이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 골목을 걷는 동안만큼은, 잠시나마 나도 그 도시 사람인 듯 느껴졌다.
그때는 몰랐다. 그 길마다 낯선 언어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불편한 시선을 견디며 버티고 있었다는 걸.
출국 며칠 전,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가 파키스탄 출신 주인을 만난 적이 있다. 우리가 나누던 한국말을 듣고 “혹시 한국에서 오셨어요?” 하고 물었을 때,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반가웠다. 그는 한국에서 몇 년간 일한 적이 있었고, 그때 배운 말로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돈을 벌기 위해 로마까지 왔다며 담담히 웃던 얼굴이 지금도 생각난다. 우리는 계획에도 없던 기념품을 봉지마다 가득 담았다.
로마에서의 여행이 아무리 즐거웠어도, 정착해서 살아간다는 건 전혀 다르겠지.
매일 걸었던 골목이 내가 살아야 할 동네라면 어떨까. 그 풍경이 여전히 낭만적으로 보일까. 아니면 차가운 현실로 다가왔을까. 낯선 언어를 배우고, 냉랭한 시선을 견디며 새 삶을 연다는 건 훨씬 더 많은 용기와 결심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들이 버텨온 이유가 조금은 이해된다.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 건, 고단함을 견디는 뚝심과, 익숙함에 머물지 않으려는 단단한 마음이었다.
줌파 라히리도, 로마에서 만난 기념품 가게 주인도, 그리고 이 책의 등장인물들도 그렇게 살아냈다. 떠날 용기조차 없는 나를 생각하면, 그들의 남다른 모습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게 된다. ‘참 잘 견디셨습니다. 누구보다 단단하고 멋지게 살아내셨네요.’
그 말은, 언젠가 내게도 건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