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쉼터, 동네 목욕탕

by 은진


예전엔 청바지가 내 트레이드마크였다. 연청, 진청, 검청을 돌려가며 입어도 질리지 않았다. 허리가 잘록한 민트색 원피스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재킷 하나만 걸치면 외출 준비 끝. 거울 앞에서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어딘가 어색했다. 청바지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원피스는 더 이상 내 몸을 감싸주지 않았다. 처음엔 세탁을 잘못해서 원단이 변한 줄 알았다. 그러다 아끼던 원피스의 옆구리가 심하게 불룩해진 걸 보고야 깨달았다. 옷이 변한 게 아니라, 내 몸이 변했다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버리려던 옷들을 다시 옷장에 밀어 넣으며 다짐했다. 그리고 찾은 방법이 동네 목욕탕이었다. 단순히 찜질로 땀을 빼려는 거냐고 하겠지만, 사우나부터 운동시설까지 다 갖춘 곳이었다. 게다가 집에서 가까웠다. 자주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평소엔 무심코 지나치던 간판. 하지만 대사증후군 검진 결과를 받고 뱃살을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곳이 새롭게 보였다. 이름부터 건강해 보이는, 푸른 건강랜드.


푸른 건강랜드는 그저 그런 목욕탕이 아니었다. 목욕탕, 찜질방, 사우나, 요가실, 헬스장까지 갖춘 종합 건강센터였다. 핫요가를 신청하자 사장님이 덤처럼 할인권을 건넸다.

“땀 쭉 빼고 따뜻한 물에 담그면 정말 개운할 거예요.”

솔깃해서 시작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 전에는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면 소파로 직행했지만, 이제는 요가로 땀을 흘리고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면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첫날부터 핫요가는 혹독했다. 몸을 비틀고 버티는 동안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후끈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다리가 후들거려 쓰러질 즈음, 수업이 끝난다. 기다렸다는 듯 곧장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씻겨 내려가면 온몸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그렇게 6년을 꾸준히 다녔다.


그러나 익숙했던 풍경이 어느 순간 달라졌다. 코로나19가 모든 걸 바꿔 놓았다. 뉴스에서는 목욕탕이 바이러스의 온상처럼 보도되었다. 손님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더니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문을 닫기 몇 주 전, 사장님은 카운터에 기대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욕탕 손님이 너무 줄었어요. 예전처럼 북적이던 때가 다시 올지 모르겠어요.”

그때만 해도 "그래도 요가랑 헬스장이 있잖아요!"라며 웃으며 넘겼다.


왠지 모르게 답답하고 무거웠던 날, 건강랜드 앞에서 그만 걸음을 멈췄다. 초록색 간판 아래, 유리창 한가운데 덩그러니 붙은 A4 용지. 검은 매직펜으로 큼지막하게 적힌 글씨가 시선을 붙잡았다.

'폐 업.’

그 아래, 사장님의 손글씨가 덧붙여져 있었다.

‘이달 말까지 개인 물건을 찾아가세요.’


생각보다 허전함이 컸다. 그곳은 하루 종일 쌓인 피로와 잡념을 씻어내던 나만의 공간이었다. 땀과 함께 하루의 무게를 씻어내고, 굳어 있던 얼굴에 생기를 되찾아주던 곳. 팔다리가 녹초가 되어도, 다음 날이면 새로 태어난 듯 가뿐해지는 곳이었다.


예전처럼 날렵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넉넉해진 뱃살도 내 몸의 일부라 여겼다. 중요한 건 단순히 살을 빼는 게 아니라, 내 몸을 돌보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건강해진다고 느꼈다.


더 이상 그곳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아직도 아쉽다.

중년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루틴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푸른 건강랜드는 내게 작은 쉼터였다.

온탕 속에서 몸을 녹이며 아무런 생각 없이 앉아 있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 시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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