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지낸다고 말하니,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여유롭겠다며 부러워하고, 커피 한 잔 들고 들판을 바라보며 명상하는 나를 상상한다. 솔직히, 나도 그런 삶을 기대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아침마다 마주치는 건 커피도, 명상도 아닌 풀과 벌레였다. 마당엔 끊임없이 솟아나는 풀, 창문 틈마다 집을 짓는 거미, 문만 열면 안으로 뛰어들 듯 달려드는 벌레들. ‘시골이 다 그렇지’ 하며 넘기려 했지만, 뽑아도 또 나고, 쫓아도 다시 오는 그 끈질김에는 당해 낼 수 없었다.
며칠째 풀을 뽑느라 손이 흙물에 절어 누렇게 변했다. ‘이게 정말 내가 바라던 삶이었나?’ 싶었다. 기대했던 여유는커녕, 쉴만한 자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때,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
"잠깐 숨 좀 고르지 그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무언가에 끌리듯,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 몇 개만 눌러보자며 피아노 덮개를 열었다. 88개의 검고 흰건반은 가지런히 그대로였다. 피아노는 많은 이들에게 음악의 출발점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배우던 시절, 학교 앞엔 피아노학원이 줄지어 있었고, 바이올린이나 통기타보다 시작하기 쉬웠다. 나 역시 스물이 넘은 나이에 동네 아이들과 같이 몇 달 배운 게 전부였다.
손이 간 김에 한 곡쯤 제대로 쳐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몇 장 넘기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내가 칠 수 있는 곡은 많지 않았다. 겨우 찾아낸 건 개인 교습소에서 배웠던 ‘바흐의 미뉴에트’. 날짜가 적힌 페이지, 군데군데 검은 볼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배운 기억이 있는데도, 손은 악보대로 쉽게 따라가지 못했다. 높은 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를 한참 들여다본 끝에 겨우 첫 음을 눌렀다. 그다음은 엉망이었다. 몇 마디도 넘기지 못한 채 멈췄다. 이렇게까지 서툴 줄은 몰랐다. 3박자의 경쾌한 미뉴에트는 비틀비틀, 첫걸음마 아기 같았다. 그래도 음 하나하나가 내는 울림은 여전히 맑았다. 무겁다며 투덜대던 이삿짐 직원들, 중고로 팔까 망설였던 날들도 그 울림 속에서 하나씩 떠올랐다.
단순히 피아노를 마음껏 치고 싶었다. 친구들이 바이엘 교본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부러웠지만, 그 마음을 입 밖에 낸 적은 없었다. 부모님도 내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한다는 걸 알지 못했을 거다. 그래서인지, 월급에서 조금씩 모아 기꺼이 쏟아부었다. 월세방 절반을 차지하는 크기였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가장 뜻밖의 경험도 피아노 덕분에 하게 되었다. 첫 발령지 근처의 시골 교회를 다닌 적이 있는데, 기존 반주자가 결혼으로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목사님은 그저 ‘피아노가 있다’는 이유 하나로 나를 떠올리셨다.
“처음 음만 눌러주면 됩니다. 그다음은 우리 성도님들이 알아서 부르실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연주 실력도 부족했고,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설득이 이어질수록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결국 ‘고향집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피했지만, “첫 음만 누르면 됩니다”라는 말 앞에 끝내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매주 긴장의 연속이었다. 손바닥은 늘 땀에 젖었고, 박자가 엇나가면 혼자 당황해 식은땀이 났다. 그런데 정말 목사님 말씀대로였다. 실수가 있어도 성도님들은 알아서 찬송가를 이어갔다. 시골 어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노래는 흐트러짐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반주하는 선생님이 없으면 어쩔 뻔했어요. 다음 주도 꼭 부탁해요."
성도들과 목사님은 매주 그렇게 나를 붙잡았다.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어느새 책임감이 생겨 2년 가까이 반주를 맡았다. 못 이기는 척 시작한 일이 돌아보면 예상치 못한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여기서 들으니 듣기 좋아.” 풀을 뽑다 말고 남편이 툭 한마디 던졌다. 방금 전, 툴툴거리며 먼저 들어와 어설프게 건반을 두드리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괜히 혼자 토라졌던 게 민망했고, 처음부터 그 서툰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 말 한마디에 어깨에 들어 있던 힘이 풀리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손에 익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굳이 고치려 애쓰거나, 밀어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 것들도 이곳에선 자연스러운 듯하다. 아직은 서툴지만, 이곳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조율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