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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일 Aug 29. 2024

텔아비브의 해변

(상)

한 시간을 더 자려고 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바깥은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이었다. 더없이 조용하던 시계 소리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날카롭게 귀에 꽂혔다. 어두운 방을 벗어나 조심스럽게 까치발로 거실로 나와 앉은뱅이책상을 꺼내어 다리를 펴고 찬장 안에 숨겨둔 노트를 펼쳤다. 마음대로 휘갈겨 쓴 꼬부랑 거리는 글씨체가 영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노력하여 또박또박 적어보겠다는 일념으로 볼펜을 바로 잡고 상기된 표정으로 한 줄씩 천천히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줌의 빛도 없이 어둠 속에서 글을 적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남편이 깰까 봐 불을 켤 수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어둠 속에 있다 보니 적응되어 내가 쓰는 글씨는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글자들이 가득한 연두색의 낡은 노트를 사랑했다. 나의 작은 세계가 깃들어 있는 물건 중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어느 날 동네 미용실 선반에 놓여있던 잡지를 읽었을 때 내 시선을 채어간 것은 텔아비브에서 이름 모를 사진작가가 정성 들여 찍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 순간, 마음에 큰 파도가 일었다. 40년 넘도록 비행기를 타본 적은 없었지만 누군가 내게 한 곳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그곳에 꼭 가겠노라고 결심 한 이후부터 나는 가질 수 없는 물건을 탐하는 사람처럼 텔아비브의 사진들을 핸드폰 사진첩에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했다.

사진들이 곧 100장 정도 모였을 때 백사장에서 걷고 있는 나를 닮은 20대의 여인을 만들었고, 그녀는 나의 상상 속에서 아주 행복했다. 그리고 그녀는 늘 늙어버린 나를 놀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지곤 했다.


그녀를 텔아비브에 영원히 머물게 하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에 그녀는 실제 인물처럼 말하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텔아비브뿐만 아니라 그녀가 원하는 어느 곳이든 갈 수 있었다.

몸이 묶여 있는 나와 달리 나를 닮은 그녀에겐 거추장스러운 현실의 제약 따위는 하나도 적용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 마음이 그녀에게 투영되는 날이 서서히 많아졌다.

‘수만 개의 보석이 반짝거리는듯한 별빛들의 찬사를 받으며 그녀는 달라붙는 모래를 씻으려 바다에 잠시 발을 담갔다. 밤이 되니 꽤 차가운 바닷물이 발등을 찰방, 적시고 지나갔다. ’ 시계 째깍거리는 소리와 볼펜이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이때가 가장 몰입하기 좋은 타이밍이다. 코에서 짭짤한 바다 소금기 냄새도 풍겨오는 듯했다.

순간 안방에서 남편의 인기척이 들리며 문이 확 열리면서 그가 걸어 나왔다.

- 뭐 해?

그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그냥 ….

- 쓸데없긴..

그는 나의 답을 들으려고 질문한 것이 아니라는 듯 화장실 문을 닫고 쫄쫄 소리를 내며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그가 화장실에서 나오기 전에 나는 서둘러 노트를 다시 찬장 깊숙한 곳에 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그가 내 옆으로 누우며 다시 말했다.

- 새벽에 일어나서 설치고 난리야.

-...

- 내일 나 당직이니까 저녁 차리지 마.

누웠으나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텔아비브의 밤바다를 거니는 그녀를 묘사하던 중에 맥이 끊겨버렸으니 아쉬움이 커질 만도 했다. 그의 숨소리는 곧 드르렁 거리는 소음으로 변했다. 요란스러운 그의 코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아침 일찍 밥을 하고, 선영을 학교에 보내고, 집안일과  장을 본 뒤, 저녁엔 일을 하러 가야 했다. 하루의 과업을 끝내지 않는 한 나에게 주어진 자유 시간이란 없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없는 건조한 일상 속에서 한 방울의 휴식이란, 텔아비브를 누비고 다니는 그녀를 생생하게 글로 그려내는 일이었다.

- 엄마, 나 용돈 줘.

- 어디에 필요한데?

선영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 문제집!

지갑에서 고기 냄새가 배어있는 오만 원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선영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현관문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나는 식탁 위의 빈 그릇을 싱크대 안으로 옮기고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반찬거리를 사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산뜻한 마음으로 쇼핑을 하러 간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생각에 작은 변화라도 주면 글을 더 잘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였다. 해외여행 중 즐거운 쇼핑, 돈을 쓰러 나가는 일. 그러니 입는 것에도 신경을 쓰고 싶었지만 내가 가진 옷들은 영 촌스럽고 오래된 것들밖에 없었다. 예로 들어 하얀색의 라운드 티가 아닌 김칫 국물이 튄 지 오래되어 다홍색의 얼룩의 흔적이 남은 티셔츠라던가, 촌스럽게 물 빠진 청바지는 유행에 맞지 않게 왕관 자수가 박혀 있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혹여나 내가 찾지 못한 얌전한 옷들을 못 찾았을까 하고 옷장을 한참 뒤적였지만 좀약 냄새가 더 나느냐, 덜 나느냐 하는 차이만 느낄 뿐이었다.


나의 시선은 선영의 방에 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옷장 문을 여니 친근한 선영의 체취가 느껴져서 좋았다. 그녀의 취향은 어른스럽고 깔끔한 옷이라서 유행을 타지 않는 옷들이 많았다. 그중에 내 눈에 들어온 건 올리브색 바지와 베이지색 카라 셔츠였다. 선영이 오기 전까지 잠깐 입고 모른 채 가져다 놓을 생각이었다. 옷을 갈아입으려는 순간 라벨이 달랑거리며 나타났다. 잠시 고민하다가 라벨을 떼지 않은 채 셔츠를 입었다. 까슬한 라벨이 등을 간지럽혔다.

희끗한 새치가 보이지 않게 머리를 다듬어서 은색 핀으로 고정했다. 얼굴에 깊게 팬 주름만 아니면 나도 여느 길거리의 젊은 사람들처럼 세련되어 보일 것이라 확신했다. 두 손으로 늘어진 피부를 뒤로 잡아당겨

팽팽하게 만들어 보였더니 조금은 나아 보였다. 일찍부터 피부 관리를 하지 못한 것에 후회가 들었다. 순식간에 늙어버린 일본의 애니메이션 여주인공이 생각나면서 마음은 아직 20대라는 우스운 문장이 아쉬움처럼 맴돌아 흩어졌다.


선영의 검은색 단화를 빌려 신고 선영의 작은 가죽 가방 안에 장바구니를 두 번 접어서 넣었다. 걸어서 20분이 걸리는 마트로 가기까지, 얼마나 다채로운 상상을 할 수 있을지 설레어서 노트를 꺼냈다. 일상의 사소한 조각들이 모여서 하나의 글이 된다고 생각하니 흥분을 감추지 못할 만큼 심장이 뛰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도입부를 생각하던 찰나,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선영 엄마!

108동의 민정 엄마가 바퀴가 달린 장바구니를 힘차게 끌며 반가운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 어딜 가길래 그렇게 예쁘게 하고 가요?

- 저.. 모임이 있어서요.

나는 깨끗하게 입고 마트에 간다고 하기가 싫어서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맨날 운동복 아니면 칙칙한 옷만 입고 다니더니, 이렇게 입으니 다른 사람 같아요.

- 네, 감사해요. 들어가시는 길이예요?

- 오늘 시댁 가야 하는 날이라 바쁘네요..

- 아..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비쩍 마른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니 애잔함이 깊게 느껴졌다. 언제 한번 민정 엄마의 사정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어쩌면 나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민정 엄마는 딸이 두 명, 아들이 한 명인데 민정 아빠의 통제적이고 가부장적인 성격으로 인해 아이들이 자꾸만 어긋난다면서 자신은 몸이 하나인데 세 명의 아이들을 다독거리려니 힘에 부친다고 말했었다. 나는 이맘때 아이들은 다 그렇다며 사춘기가 지나가면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줄 것이라 말했던 것이 생각났고, 오늘 아침 선영의 행동이 떠올라 머쓱해졌다.

그녀와 헤어진 후 마트에 도착해 카트를 이리저리 끌며 반찬 목록을 되짚었다. ‘시금치, 멸치볶음, 돼지 불고기, 과일.’ 그러고는 각종 과일이나 신선 채소 판매대가 있는 곳으로 카트를 끌고 갔다. 목적은 회색 트롤리에 모여있는 시들려고 하거나, 생채기가 나서 정 가격으로 팔지 못하는 과일이나 채소들을 파격적으로 할인해서 판매하는 곳이었다. 바나나는 2개가 검은색으로 변해서 1,300원. 방울토마토는 전체적으로 시들어가는 바람에 3,700원. 맛은 똑같지만 겉모습 때문에 제값으로 팔리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오히려 비싼 과일값을 신경 쓰지 않고 물렁한 바나나라도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 참이었다.

맞은편의 사람이 카트를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만두 시식코너 쪽으로 넘어졌다.

- 어머, 괜찮으세요?

- 아유, 이걸 어째!

마트 직원이 나를 얼른 일으키며 옷 위에 떨어진 만두를 털어냈다. 옷에 양념된 만두들이 굴러간 양념 자국이 생겨버렸다.

- 얼른 닦으면 지워질 거예요!

물티슈를 건네받고 양념을 닦으니 생각보다 잘 지워지지가 않았다. 나의 옷이 아니라 선영의 옷. 그러니까 선영의 새 옷이라서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화장실로 달려가서 비누로 지워봤지만 희미해진 자국이 완벽하게 지워지진 않았다. 그 기점으로 나의 시간은 오묘하게 틀리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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