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가 정말 싫었습니다만 쓰고 있습니다.

오늘 생각 3

by 은진

나는 1남1녀 중 장녀다.

아이에게 장녀 타이틀은 많은 것을 누리게 해주기도 하지만 거추장스러운 일들이 따라붙게도 한다.


외가 쪽 첫 아이였던 나는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외할머니께서 용돈을 챙겨주셨던 손주도 내가 유일했다. 할머니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나를 부른다고 생각하셨겠지만, 할머니의 봉투는 모두가 알았으나 굳이 문제 삼지는 않았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제일 막내 사촌 꼬맹이마저 누나에게서 나는 돈냄새를 귀신같이 맡고 문구점에 갈 때마다 따라붙을 정도였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약간의 육체적 심리적 압박이 느껴지는 때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방학기간이었다.


국민학교시절 내가 제일 싫어했던 방학숙제는 '독후감'이다.

방학숙제는 개학 직전에 몰아서 하는 게 미덕이지 않은가?(방학이면 외손녀 사랑이 지극하셨던 할머니의 호출로 외가에 가있었으므로 엄마는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셨을 거다.)


개학을 목전에 두고야 급하게 읽고 열불 나게 써 내려가는 독후감이란... 지금 생각해도 한숨이 다 난다. 그렇게 겨우겨우 독후감과의 싸움을 마칠라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울먹이는 목소리가 린다.

"누나... 나 좀 도와줘."


두 살 터울 남동생의 다급한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했다. 니 숙제는 네가 해야지 왜 이제 와서 이러냐는 둥 엄마한테 이른다는 둥 선생님께 걸려서 혼나봐야 정신을 차린다는 둥 어린것이 더 어린것에게 잔소리를 쏟아내면서도 손은 이미 쓰고 있었다.


붙어 있으면 무조건 싸우는 사이인데도 내 동생 내가 패지(사실은 내가 맞았다.) 밖에서 혼나는 꼴은 보기 싫었나 보다.

만약 지금 내 아이가 도와달라고 하면 칼같이 거절할 텐데 싶어 웃음이 난다.






그리하여 나는 독후감 극혐자가 되었다.

이게 이유가 되냐고, 그런 기억이 없다고 동생이 항의한대도 나는 일단 우겨보겠다.


독후감뿐만 아니라 쓰는 것은 종류 불문 대체로 좋아하지 않았다. 꾸준히 읽었지만 쓰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던 내가 다시 무언가를 읽고 감상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아이 때문, '덕분'이다.


아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책 읽는 것을 참 좋아했다. 육아를 해 오면서 내가 잘한 일중 하나를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책을 가까이 하도록 환경을 조성해 준 것이라고 하겠다.

책육아라는 단어도 몰랐고, 그러니 책육아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세미 책육아 정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도서구입비가 적지 않게 들어간 것은 물론이다.




아이가 초등 3,4 학년 무렵 처음으로 인스타그램에 그림책 서평을 쓰게 되었다. 독후감을 싫어했던 기억 따위, 아이를 위해서라면 다 극복할 수 있었다. 양질의 책을 다양하게, 훨씬 더 많이, 심지어 무료로 읽힐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짧은 글과 그림 안에 너무나 명확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그림책을 읽고 쓰는 것은 힐링에 가까운 일이었으니 더더욱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건네는 족족 재밌게 읽는 모습을 보면서 또 얼마나 뿌듯했던가.


그렇게 그림책의 매력에 빠지고, 그다음은 아이의 연령에 맞는 동화책, 비문학, 청소년소설까지 평생 읽은 책 보다 더 많은 책을 읽으며 나의 감상을 담은 책소개를 쭉 이어가고 있다.




해가 갈수록 아이의 독서량이 줄어든다. 아이를 위해 준비한 책을 나 혼자만 읽고 창작의 고통을 느끼는 일이(쓰는 것이 여전히, 점점 더 어렵다) 잦아졌지만, 포기하거나 중단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깔아 두면 언젠가는 다 읽게 되어 있다는 신념이 여전하기도 하고, 시작은 아이를 위해서였지만 나 또한 그를 통해 얻은 즐거움이 적지 않으며, 스스로 조금이나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한 가장 큰 변화는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입으로는 잔소리를 퍼부으며 손으로는 써 내려가며, 눈으로는 억울함의 눈물을 찔끔찔끔 생산하던 그 시절을 떠올려보면 스릴러급 반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더불어, '내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나의 일부를 드러내야 된다는 뜻임을 알기에 오랫동안 망설였다.


야식을 좋아하는 나에게 남편이 늘 하는 얘기가 있다.


망설임은 배달 시간만 늦춘다.

어차피 먹을 거잖아?

얼른 먹고 일찍 자!


이 말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망설임의 시간을 충동적으로 끝내버렸다.


맛있게 먹고 탈 나지 않고, 추천까지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음날이면 또 이불킥에 먼지를 폴폴 날릴 각로 조금씩 써보기로 마음 먹는다.


쓰기가 정말 싫었습니다만,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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