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각 2
딸을 낳고 싶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엄마와 딸의 다정한 모습이 좋아 보였던 것 같다. 나 또한 엄마와 사이가 꽤 좋았으므로.
딸을 가진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져 리본공예를 배웠다. 취미로 시작한 것이 자격증까지 번져 예상외의 큰 지출을 하면서도 전혀 아깝지가 않았더랬다. 내가 만든 커플 액세서리를 함께 하는 상상에 즐거웠다.
결혼 3년 만에 아이를 가졌다. 양가 부모님께서도 우리 **이가 원하니 딸을 주십사 기도하고 있다고 하셨다. 성별을 확인하던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순간 왈칵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다행히 울지는 않았다. 아이에게 이런 마음을 들키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딸 같은 아들'을 낳았다.
먹는 것, 자는 것 모두 쉽지 않아 신생아 시절에는 엄마를 많이도 울게 했던 아이었는데 제 발로 서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유행을 좇아 말하기 수업을 받기 위해 책을 미리 사두었지만 해당 연령이 되기도 전에 말문이 트인 아이는 신기하게도 나와 말이 잘 통했다.
말이 잘 통하니 설득이 되고 설득이 되니 육아가 한결 수월해졌다. 여전히 입맛이 까다롭고 잠자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아가였지만 말이다.
유모차 시절부터 엄마와 카페 나들이를 즐겼던 아이는 중학생인 지금도 여전히 나와의 시간을 허락한다.
놀이책이나 퍼즐이 들어 있던 가방 안에 이제는 문제집이나 청소년소설 등이 들어 있다. 그것만이 유일한 변화라고 생각했다.
딸 같은 아들이라는 표현을 쓰게 했던 내 베스트 프렌드 '다정한 공감자'가 변했다. 점점 무뚝뚝해져 가던 아이가 어느 날은 MBTI가 바뀌었다고 했다. F였는데 T가 됐다나? 이런, T 둘에 F 하나라 이건 좀 곤란한데... 남들이 보면 유난이라고 하겠지만 다정한 아이에게 길들여져 있던 나에게는 그것이 사춘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느껴졌다.
그 무렵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다정했던' 아들이 갑자기 엄마를 싫다고 하고 함께 있는 것조차 꺼린다는 글을 읽은 터라 더 불안했던 것 같다.
이론과 실제는 조금 다르지 않은가? 유리멘탈인 내가 견딜 수 있을지 겁이 났다. 힘든 사춘기를 겪을 아이가 아닌, 내 걱정을 먼저 하다니 철은 언제 들려는가 싶기도 했다.
긴장했던 것만큼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함께 미술관에 가기도, 쇼핑을 다니기도,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아이는 조금 더 무뚝뚝해졌고, 말투가 조금 변했다.
그리고 어제, 그 말투에 엄마의 발작버튼이 눌리고 말았다. 누른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눌렸다.
즐겁게 미술관으로 향하던 차 안이었다.
'응, 아니, 응'의 단답에 무심한 어조가 섞인 대화가 몇 차례 오가자 순간 목소리가 커졌다. 스무고개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알고 싶은 건 하나인데 몇 번의 질문을 해야 하는지, 요 며칠 참고 있던 것들이 더해져 불같은 화가 치밀었다. 벽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똑바로 대답하라고 아이를 다그쳤다.
아이는 어리둥절해했다. 억울해 보이기도 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너는 잘못한 게 없다. 누르지 않았다.
나에게 맞춰 너를 재단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식의 대화가 일상이 될까 두려웠고 서운했고 그래서 눌려버렸다.
다른 엄마들이 아이와의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화가 잔뜩 나 있을 때, 나는 대부분 아이의 입장을 먼저 이해하려는 쪽이었다.
흔한 말 있지 않은가?
'애들이 다 그렇죠, 정상입니다.'
엄마가 화가 난 포인트도 이해가 가지만,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 보자면 너무나도 정상적인 발달 과정이자 반응이기에, 엄마가 아이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 실제로 아이에게 특별히 큰 문제가 없었으므로.
그런데 막상 그게 내 일이 되고 보면 밀려오는 걱정과 설움에 터져버리고 마는 거다. 그동안 육아서를 읽으며 그은 밑줄들이 부끄럽게도 말이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우리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절친 모드로 들어선다.
아이가 먹고 싶다던 메뉴도, 오랜만의 미술관 나들이도 만족스러웠다. 돌아와서는 근처 카페로 향해 조용히 책도 읽고, 최근 이슈가 된 글을 함께 읽으며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오늘 정말 재밌었다."
함께 한 반나절에 대한 아이의 한 줄 감상되시겠다.
"오늘 엄마가 화도 많이 냈는데, 괜찮았어?"
사과인지 변명인지를 하고 싶었나 보다. 갑자기 화를 낸 건 미안하지만 다 이유가 있었노라고.
'사춘기 아이와 엄마의 애증'이라는 말을 꺼내자 아이가 말했다.
증이 있어? 나는 증은 없어.
아... 말문이 막혔다. 나는 혼자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북 치고 장구치고 생쑈?
사춘기라는 단어에 지레 겁을 먹고 이미 약하게 지나고 있을지 모를 그것, 어쩌면 아직 오지도 않았을 그것 때문에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키는 어리석은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역시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증이 없다라... 이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달라 보인다면 우스운가? 나는 이렇게도 쉽게 아이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영향을 받는다.
내 말 한마디도 아이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줄까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반성할 일이 생길 때마다 글을 쓰고 싶은가 보다. 그렇다면 글감 떨어질 일은 없겠군.
이 글은 엄마로서 성숙하지 못한 나에 대한 반성이자 고백이자 다짐이다.
동시에 '사춘기'라는 놈을 향한 유리멘탈 엄마의 부탁이자 경고이기도 하다.
저기, 지금 여기 있다면, 올 거라면
잠깐만 있다가 후딱 가줄래?
우리 아들에겐 아직 '증'이 없대.
계속 없었으면 좋겠어. 부탁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