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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떡을 썰고 너는 글을 쓰는 시간에 대하여

오늘 생각 6

by 은진

시끄럽게 돌아가던 식기세척기가 멈췄다.

갑자기 뚝. 시간도 덩달아 멈춘 듯 고요해지는 순간 개를 돌리자, 노트북을 열어 놓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의 옆모습이 보인다.

무얼 그리 열심히 보고 있나 물으니 내일 있을 수행평가 대비 자료를 찾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

나는 떡을 썰고, 쟤는 글을 쓰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일에 몰두하는 시간, 나는 종종 그것을 떡과 글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각자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지금처럼 나는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고 저 아이는 노트북에 들어갈 듯한 자세를 하고 있는 시간 말이다.





첫 번째 글에서 고백했듯이 나는 욕심이 많은 엄마다.

(1화를 읽어달라고 언급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행히도 욕심은 많으나, 머릿속을 부유하는 미션들을 모두 클리어하기엔 체력이 달린.

에너지가 부족하고 적잖이 게으른 덕에 욕심만큼 아이를 닦달하지 못한다.

아마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더 다행인 것은, 처음부터 에너지 레벨이 이렇게 바닥은 아니었다는 거다.

체력이 지금처럼 훅 꺾이기 시작한 것은 마의 45세 무렵, 2~3년 전 즈음이었으니 초등 고학년이 되기 전까지 '스스로' 할 수 있는 뼈대를 세워줄 시간은 충분했던 셈이다.




아이자랑인지 내 자랑인지 모를 이것은, 어쨌든 은근한 자랑이다.


어디 스스로 하는 습관 기르기가 쉬운 일이란 말인가.

공부를 왜 이렇게 안 하냐고 시간을 왜 그렇게 이상하게 쓰냐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사실 마음 깊숙한 곳의 나는 알고 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하는 아이가 기특하다는 것을 인정하자니, 누가 그리 키웠나 하며 내 자랑이 은근슬쩍 끼어들 틈도 생기는 거다.


내 교육 방식이 탁월해서라거나 아이가 워낙 뛰어나서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눈이 아프도록 정보를 찾고, 거르고, 실행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만만치 않은 과정 속에서 나는 아이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을 찾으려 했고(이것이 능력이라면 능력이랄까 흐흐흐), 아이도 곧잘 협조해 주었다.


우리는 아직 꽤 괜찮은 팀플레이를 하고 있다.

학원을 다니지 않아 불시 점검은 필수이므로, 유지보수쯤은 할 수 있는 에너지는 항시 쟁여두려고 노력한다.




중1, 이제 겨우 시작이려나 싶은 시기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잘 고 있기에

가끔 우스갯소리를 한다.


"제가 갑자기 안 보이거든, 뭐가 뜻대로 안 된 모양인가 보다 하세요."


여기서 '뭐가'는 아이의 성적이려나.


그래도 말이다.

앞으로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노력과 성과를 묻어둘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일 0점을 맞을지도 모른다고 오늘의 100점을 모른 척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극단적인 예를 방패 삼아보자.


그리하여 나는 지금 자랑한다.

떡과 글의 시간을.



음악 좀 틀어줄래? 조용한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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