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보자기 아트 : 오늘의 보자기 / Editor. 녕
문을 열자마자 가지런히 놓여있는 가지각색의 보자기가 보인다. 한복에서나 보던 비단 보자기.
추석을 앞두고 우리는 주황색, 아이보리색, 청록색, 갈색 가을을 닮은 색을 받았다. 친절히 놓여있는 수업 설명서에 ‘보자기 아트란 ~친환경적인 실용 아트입니다.’라고 쓰여 있었고 제로웨이스트 포장을 핑계로 에디터들을 꼬셔 원데이 클래스를 신청했지만 사실 나는, 곱디 고운 색들을 맘껏 즐겨보자는 꿍꿍이였다.
비단천을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정정하다 못해 꼬장꼬장한 우리 할머니는 옛날부터 최고 멋쟁이였다. 외출할 땐 지금은 ‘맘 핏(mom fit)’이라고 불리는 하이웨스트 청바지에 얇은 깜장 벨트를 차고 재킷에는 고급진 브로치를 달았다. 꼭 그렇게 입고 계절마다 나의 새 옷을 사러 엄마보다 자주 함께 다녔다. 한복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나서부터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진 옷이 작아질 때마다 새 한복을 샀다. 20년보다 더 전에도 한벌에 20-30만 원은 하는 돈이었다. 비싸게 주고 사서는 일 년에 한두 번이나 겨우 입는 한복을 왜 그렇게 매번 사입히시냐는 엄마의 성화에도 할머니는 때가 되면 무슨 색이 좋으냐 물었다. 그즈음 좋아하는 색들로 골라 말하면 할머니가 잘 조합해서 맞춤한복으로 만들어다 줬다. 안타깝게도 내 기억 속의 한복은 가짜 눈웃음을 지으며 할머니와 머리를 맞대고 찍은 어린 시절 사진 속 진달래를 꼭 닮은 한 벌 뿐이지만.
20대 초반 졸업과 취업을 앞두고 불안한 경계에 서있을 때 할머니에게 자주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자주 물었다, 그녀의 삶은 어땠는지 그리고 그 삶이라는 게 팔십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에게도 녹록지 않은 것이었는지. '그냥 살았으니까 살았지'라고 시작되는 대답은 땅끝마을 시골 해남에서 빈 손으로 서울에 상경해 시장바닥을 전전하며 삼 남매를 키웠던 이야기일 때도 있었고, 광주 민주화운동 때 광주에 살던 사촌들이 몰래 도망 와 넉넉지 않은 살림을 나눠 살던 때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고 어떻게 살았대?'라고 놀라 물으면 또 '그냥 살았으니까 살았지'라고만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녀는 그런 질문을 하는 나에게 한 번도 '힘드냐'라고 호들갑 떨며 묻지 않았다. 도리어 '할머니, 나는 못살겠어 못살아 못살아. 어떻게 반백년을 더 살아' 하는 우는 소리에 '뭘 못살아, 할머니랑 살아' 하고 웃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면 들려준 생애의 궤적들이 해결책을 준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한 발자국 정도는 내딛어 볼 수 있게 했다. 화려하고 근사한 보자기천을 내게 둘러주는 동안에도 그냥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을 세월을 견뎠으리라 짐작만 하면서.
그때 할머니가 만지작 거리던 색색깔의 보자기천들은 이제 내 손 끝에 닿았다. 그녀가 담은 것보다 훨씬 소박한 마음을 작은 봉투에 담아 청록색의 고운 천을 배운 대로 돌돌 정성스레 감싼다. 시간이 흘러 형태는 변했어도 달라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색동 보자기를 보자면 그때의 그리고 오늘의 할머니 생각이 난다.
*Place*
✔️오늘의 보자기 / insta@today_bojagi
: 전북 익산시 동서로 514 하나빌딩 103호 (이사 예정)
: 보자기 아트 원데이 클래스 (4가지 정도의 보자기 매듭 포장, 보자기 재료 포함)
: 그 외 보자기 아트 취미, 자격증 수업, 예단포장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