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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cal editor May 16. 2024

돌고 돌아 컴백홈, 마감은 침대와 냉장고 사이에서.

Editor's Place 글을 쓰는 공간 / Editor. Cholog


마감이 다가온다. 깜박이는 커서가 날아와 꽂힌다. 대학원생의 마감은 매일 밤 찾아온다. 태평하게 누워 릴스를 넘겨대는 동생을 보면 나의 시간과 너의 시간은 왜 다른 템포로 흘러가는지 억울함이 생기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마감이야 마감을 외치며 빠르게 시선을 옮긴다.    

  

무엇이든 써야 하고, 무엇이든 제출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마감만이 살길인 대학원생의 쓰는 일은 대부분 식탁인지 책상인지 용도가 불분명한 흰 탁자에서 실행된다. 이사를 오느라 아무것도 없던 이 집에 있던 유일한 가구였다. 바퀴가 있어 옮기면 둘러앉는 식탁이 되고, 벽에 붙여놓으면 책상이 되는 유용한 물건이다. 밤늦게 쓰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여유 있는 날에는 꼭 나가고 싶어지는 충동이 생기는데 마음에 쏙 들어맞는 공간을 찾는 일이란 쉽지 않다. 꼭 이상형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점점 좋겠는 기준은 늘어만 가는데 우드 탁자 삭제, 푹신 의자 삭제, 창가 삭제, 10분 거리 삭제처럼 결국 삭제할 리스트만 쌓이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컴백홈이다. 그렇지만 8평 남짓한 집은 고개만 돌리면 4면이 콘텐츠라 재택근무의 고됨을 백수인 오늘에서야 이해하게 된다. 언제든 눕고 싶은 침대는 나를 이끌고, 냉장고 안에는 먹거리가 가득하고, 오늘따라 유독 눈에 띄는 먼지들은 탈탈 털어내고만 싶고, 동생은 핸드폰을 잡고 낄낄거리고.     


“있잖아, 시험 기간에는 청소도 재미있잖아. 내가 지금 그래.”     


며칠째 미뤘던 화장실 청소를 하고 싶어 진다. 괜히 피아노를 뚱땅뚱땅 치고 싶어지고, 고르기만 하다 10분 20분이 훌쩍 넘어가는 넷플릭스도 지금은 척척 고를 수 있는 기분이 든다. 못하는 물구나무라도 서면 아이디어가 떠오를까 싶어 정수리를 바닥에 대어 본다. 분명 어젯밤 꿈속에서 글을 다 썼었는데 뭐였더라? 아까 버스에서 생각난 문장이 있었는데 그건 뭐였지? 하루키만큼의 성실함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아니지 아니야 교수님이 조금이라도 너그러우셨다면 없는 종교에 구걸하며 울상 짓고 있지는 않았겠지. 자책과 책망을 반복하다 겨우 쓴 몇 글자를 몇 번의 클릭으로 지운다. 엉덩이의 시간과 글자 수가 비례하지 않는 이 일이 결국 나의 몫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밥을 먹은 뒤에는 설거지부터, 집에 오면 씻는 일부터, 여행 후에는 캐리어를 정리하는 일부터, 미루지 않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왔는데 말이야. 이건 정말이지 미루고만 싶은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서 바퀴 달린 탁자는 좋은 작업대가 되어준다. 벽에만 붙이면 책상이 되니 앞은 아무것도 없는 흰 벽이요, 검은 것은 글자로다. 양 눈 사이 시야각을 단숨에 차단한다. 째깍째깍 시간은 흐르고 백색소음과 투정은 이제 모두 사치다. 화장실을 가고 싶을 땐 여기서 언제든 일어나 네 번만 걸으면 되니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고 언제든 허리가 아플 땐 요가 매트를 펼쳐 스트레칭을 할 수도 있어 최적의 조건 최상의 선택이다. 비록 맛난 커피는 없지만 엄마표 비트차와 척추 건강을 챙겨줄 자세 교정 의자가 이때만큼 든든할 수가 없다.     


매일의 기한은 정해져 있고 여러 유혹이 끊이지 않는 전쟁터에서의 고군분투도 언젠가 끝이 나듯 승패를 묻지 않을 밤도 역시 매일 찾아온다. 나는 졌든 이겼든 오늘의 과제를 하얀 탁자 앞에서 해낸 것이다. 하나둘 성취해 낸 밤이 침대와 냉장고 사이에서 쌓여간다. 어색하기만 했던 새터에서 12개월을 보내며 차곡차곡 해낸 순간들이 집 안 곳곳에 묻어간다. 이상형 찾기에 걸맞은 곳을 동네에서 꼭 찾고 싶으련만 이토록 희망찬 밤을 이길 재간이 없으니 사실상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전투 앞에서 심신 미약 상태의 나와 뭐라도 쓰고 있을 나와 어찌저찌해낸 내가 공존할 내일은 야속하게도 찾아오겠지만 하얀 탁자 앞에서 쌓은 엉덩이의 힘으로 오늘도 내가 결국 해냈으니. 


모쪼록 내일의 성실을 약속하며, 미루기를 이겨낸 밤이 끝난다.


Local Editor Cholog 초록 씀.



*Editor's Place*

마음에 딱 맞는 공간을 찾는 일이란 마감을 지키는 일처럼 힘겹고 이상형 찾기처럼 어려운 일이더군요. 

이달의 “쓰는” 공간은 에디터의 집입니다. 

일기, 편지, 필사, 과제 등등 고군분투로 각자만의 쓰는 시간을 보내는 곳은 어디인가요? 

글을 읽고 댓글을 통해 이야기를 나눠주세요.

우리는 언제나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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