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Essay 글을 쓰는 일 / Editor. 궁화
사랑이 뭔지도 모를 쥐방울만 한 꼬맹이는 사랑을 귀여니 선생님으로 배웠다. 학교 도서실, 많고 많은 도서 중에 왜 하필 계이름이 적힌 표지가 눈에 띄었는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선 채로 뚝딱 읽고 나선 슬그머니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난다. 사춘기 정통으로 맞은 11세.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사랑하게 된다.
공모전이 뭔지도 모르면서 교내 부착된 포스터를 보고 글짓기 대회를 나가지 않나, 출판사를 차리겠다며 작가를 모집해야 하니 반 친구들한테 글을 연재해 오라고 시키기도 했다. 나는 그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른들 눈에는 쓸데없는 사업 구상하는 걸로 보였는지 금세 생각하는 걸 들켜 종종 혼나곤 했다. 아직도 왜 혼났는지는 모르겠다. 조금 더 지나서는 가사를 쓰겠다며 음악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금지당했다. 그래서 가사도 몰래, 모 연재사이트에 연재하는 글도 몰래 쓰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쨌거나 지금은 글 쓰는 대학을 나와 결국 이것저것 다 하는 27세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왜일까. 글 쓰는 게 어려워졌다. 그렇게 쓰고 싶은 글 마음껏 쓸 수 있는 어른이라면 어른이 되었는데 쓸 수가 없다. 나름 문화기획을 하는 사람이라며 글은 계속 쓰고 있는데 무언가 잊어버린 기분이다. 어쩌면 사회에 반항적인 가사를 쓰던 중학교 2학년 나는 알고 있었던 걸까. 손때 탄 가사 노트 한구석에는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글씨로 ‘세상에 무릎 꿇는 어른이 되지 말자’라는 글이 남겨져 있었다. 십여 년 후에 나는 요즘 말로 MBTI에서 극악무도한 T가 되어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때 그 시절 ‘내가 니 별이다.’라던가 ‘죽도록, 미치도록, 온 우주가 다 터져나가도록.’ 이런 대사에 베개가 다 젖을 정도로 펑펑 울며 전자사전에 다음 페이지를 눌렀던 감성이 조금은 그리워진다.
글을 쓰는 걸 그간 떼어내려 해도 떼어낼 수 없었던 건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내가 유일하게 표출할 수 있던 감정의 배출구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매일 참을 인 수백 번을 외치다 해탈의 경지에 오른 어른 연기를 하고 있다 보니 작고 귀여운 감정까지도 어딘가에 자물쇠를 걸어 숨겨놔 기억 일부분이 뿌옇게 보이는 것처럼 글을 쓰려다가도 멈춰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저 이번에는 꼭 글 쓸 거예요.’라고 말만 하기를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여전히 하루살이로 살기 급급한 스물일곱. 요새 어디서나 들려오는 선재가 도대체 뭐길래 난리인가 싶었는데, 강제로 사름 끝 방에 앉혀 작은 핸드폰 앱으로 <선재 업고 튀어>라는 드라마를 보여주는 친구들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날을 새서 14화까지 몰아보게 된다. 오래전 내 눈을 매일 퉁퉁 붓게 만들던 대사를 요즘 드라마에서 듣게 되다니,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지금은 메마른 상상력을 끌어다 이 드라마가 내게 닿은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며 책상에 앉았다. 내 손목에는 시간여행이 가능한 시계는 없고 손목 보호대만 있지만 지금이라도 어린 내가 빌었던 소원을 이루어줄 순 있지 않을까.
쓰자. 뭐든 써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코가 찡해졌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 걸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기뻤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과거를 바꾸긴 어렵지만, 미래는 내가 바꿀 수 있다. 왜 주인공 솔이 온 힘 다해 미래를 바꾸려 했는지 알 것만 같다. 만약 지금 이 순간이 더 미래에서 온 나라면, 조금은 미뤄졌을지언정 글을 써야만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니까. 어딘가에 던져 놓고 잊어버린 열쇠를 찾아 문을 열어야겠다. 처음 말을 튼 그때처럼 천천히, 내 감정과 상상력을 다시 글로 남길 수 있도록.
좁지만 등받이가 있는 의자. 굳이 굳이 몸을 웅크려 의자 위에 두 발까지 올려둔 채 의자 주변이 바다로 둘러싸여 의지할 곳이 세상에 의자 하나인 것만 같을 때 글을 씁니다. 번외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다른 지역에 있는 카페나 바다 앞에서 홀로 쓰는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Local Editor 궁화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