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Place 대전책방 / Editor. 궁화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했던, 왜인지 불안한 마음으로 잠 못 이룬 밤. 본능적인 위기감이었던 것인지 아침을 맞이한 순간부터 무례한 이들에게 일주일을 시달리게 된다. 어찌나 어안이 벙벙하던지 오랜만에 억울한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졌다.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시험해 보려 들던 스무 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던 그날은 정말 오랜만에 시간을 쪼개 애써 만든 ‘영감 데이’였다. 그마저도 그냥 가지 말까, 해내야만 하는 일이 산더미인데 내가 영감 데이를 가져도 될까 하며 주저한 탓에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문밖을 나섰다. 1시간가량 차를 타고 가면서도 괜한 죄책감에 잔잔한 음악으로 가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대전. 학생 때는 마음이 불안하면 종종 홀로 기차 타고 오긴 했는데 오랜만에 둘러본 대전은 어느새 멋진 경제도시가 되어있었다.
이 영감 데이마저도 ‘바쁘다 바빠.’를 외치며 어느 구불구불한 오르막을 올라가니 옹기종기 모여있는 예쁜 단독 건물 단지가 보였다. 그중 가장 안쪽에 있던 건물이 내가 찾던 목적지였는데, 그곳의 이름은 <버찌책방>이다. 반짝거리는 간판을 본 순간 ‘아, 조금만 더 일찍 나올걸.’하고 후회하게 됐는데, 다른 의미로 마음먹고 집 밖을 나선 일은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들어간 곳에서 느껴지던 책 냄새와 우연히 들린 클래식. 책 한 권 한 권을 위해 짠 것이 분명한 책장과 통창에서 쏟아지는 가을 햇살. 사장님이 정성껏 내려주신 필터 커피를 한가득 입에 물며 숨을 참아 공간과 한 몸이 되고자 했다. 이미 완벽한 공간을 보고 있자니 나의 다급함이 한 겹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각 공간의 주인장을 닮은 확실한 공간만큼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느껴지지 않는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만의 선을 만들 때 내 주변을 동그란 선으로 그린다는 건 무척 정교하고, 곡선에 닿을 무언가에게 보여주는 포용력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 부끄럽지만 용기 내어 영감 한 스푼을 호로록 삼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째깍째깍. 다급함을 다시 주워 입고 사장님께 다시 한번 방문하겠다는 말을 남기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사장님은 조용히 책 구매에 대한 적립과 먼 곳에서 방문한 것에 감사로 엽서를 선물했다.
다음 장소는 이상적인 내 로망. 간판 없는 어느 페인트 거리에 있던 <작업실추신>, 사유의 공간이었다. 공간을 운영하면서 가장 되고 싶었던 모양새로, 온종일 자의적으로 갇혀있고 싶은 작업실의 형태의 공유 서재였다. 이마저도 예약시간보다 늦게 되어 미리 양해를 구했는데 안전하게 오라는 그 다정한 한마디에 대전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구석구석 닿은 주인장의 흔적. 공간을 이용하는 이들에게 한없이 친절한 설명과 배려가 가득했다. 좁은 공간 속 낯선 분과 이용하는 시간이 겹치게 됐는데, 주인장의 다정함에 지저분한 물감을 휘휘 저어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발걸음 소리조차 지우고 둘러보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각각의 자리마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메모지에 끄적이며 두 번째 영감을 곱씹었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 대전에서의 마지막 행선지는 저녁식사를 위한 식당이었다. 저녁은 맛있는 걸로 먹으라던 얼굴도 모르는 주인장의 친밀한 인사를 건네받은 덕분일까, 굉장히 멋진 신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자리를 안내해 주던 호텔리어의 정갈한 무스 바른 머리와 정중하고 우아한 태도는 정말로 내 영감의 여정을 종착역까지 에스코트하는 기분이었다. 다정함의 동그라미가 완성된 것 같았다. 여행길에 올라섰을 때 보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집에 도착했다. 그렇게 늦은 밤 평온한 마음으로 돌아와 말도 안 되는 불안감을 머리에 이고 잠에 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너무나도 뾰족한 이들에게 찔리고, 울고 나서야 비로소 동그라미가 준 안정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굳이 만든 영감 데이는 이번에도 나에게 한 번 더 버틸 힘을 심어주었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의 안식을 위해 자신과 맞는 공간을 찾고, 생각을 더하고 싶어 하는구나 싶다. 그 다정함이 주는 힘이 나를 더욱 견고하고 다정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도 굳건히 내 주위를 동그라미로 그려내기 위해 노력해야지.
*Editor's Pick place
① 버찌책방, 책이 채우고 사람이 완성해요.
대전 유성구 반석로 142번 길 15-38 1층 / insta @cherrybooks_2019
@cherrybooks_2019
② 작업실추신, 아직 남은 이야기. 읽고 쓰고 사유하는 삶.
대전 대덕구 계족산로 17번 길 40 1층 / insta @room.postscript
자신만의 선을 만들 때 내 주변을 동그란 선으로 그린다는 건 무척 정교하고, 곡선에 닿을 무언가에게 보여주는 포용력이 아닐까 하는 마음. 그렇다면 나도 굳건히 내 주위를 동그라미로 그려내기 위해 노력해야지.
Local Editor 궁화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