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조화 Oct 29. 2022

여백의 미

꿈의 꽃무리를 덜어내다


내 인생에 꽃이라는 점을 찍기로 했다. 이 점이 어떻게 연결될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Connecting the dots.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라는 스티브 잡스의 유명 연설 내용 중 하나이다. 그는 높은 학비 때문에 대학교를 자퇴한 후, 진정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학문들을 탐구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캘리그래피였다고 말한다. 본인의 인생에 실용적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그 매력적인 활자들에 파고들었고, 10년 후 자신이 개발한 컴퓨터에 이 아름다운 서체를 탑재하여 출시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이 서체 공부가 어떻게 쓰일지 스티브 잡스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가 말하길,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들을 연결할 수는 없다. 오직 과거를 되돌아보며 점들을 연결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이 점들이 나중에는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무언가에 도전할 때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고. 나 또한 꽃이 좋아 꽃꽂이를 시작했지만 나중에 이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약 몇 개월 만에, 내가 가진 점들이 꽃과 연결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에는 이 희미한 연결고리들을 선명하게 이은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나는 배움에 계산기를 두드렸었다. 항상 꿈이 생기면 그 꿈을 이루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리고 이뤘을 때의 보상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과거 대학시절, 미술사가 재미있었던 나는 미술관에서 전시기획 업무를 하는 학예사라는 직업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리곤 어떻게 하면 학예사가 될 수 있는지, 학예사가 되면 어떤 업무를 하고 얼마만큼의 보수가 주어지는지를 검색했다. 도서관에서 준학예사 자격증 시험 과목 중 하나인 박물관학, 미술사학 책 등을 찾아보았고 보수 등에 대해 열심히 알아보았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되어 이 꿈을 포기했다. 미술대학교 학사는 물론이고 석박사 출신 지원자가 줄을 섰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 매우 힘들 것이며, 겨우 구하더라도 보수는 매~우 적을 것이라는 많은 글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영어영문학과 전공이다. 이미 미술대학교 졸업장을 가진 많은 학예사 준비생들이 저 멀리 나아가고 있었고 나는 출발선에도 못 선 상태였다. 심지어 열정 페이까지 각오하라고? 아, 꿈조차 꾸지 말아야지. 학예사에 대한 나의 열정과 에너지는 그 리스크를 모두 감당하기엔 부족했다. 쉬운 것이 없는 세상에서 나는 항상 이렇게 쉽게 포기하기만 했었다. 이 꿈 말고도 얼마든지 다른 꿈을 꾸고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20대의 자신감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30대가 되어서야 다른 선택을 하기로 했다. 계산기를 두드렸을 때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았지만, 일단 꽃을 배워보기로 했다. 인생에 꽃이라는 점을 찍기로 했다.


 만만하게 보여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이 일을 취미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고 무언가 성과도 내고 싶었는데, 꽃집을 여는 일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꽃집은 계속 늘어나고 꽃값도 몇 년째 계속해서 오르는 것을 플로리스트 친구 옆에서 생생히 보아왔다. 아름다운 꽃을 만지는 일 외에 무거운 대형 화병 청소와 상상 이상으로 많이 나오는 쓰레기를 치우는 일의 노고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플로리스트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서비스직이기도 하다. 친구의 꽃집에 앉아있을 때, 한 손님이 ‘고속터미널 꽃시장에서는 엄청 저렴한데, 여기는 꽃이 왜 이렇게 비싸요?’라고 묻는 것을 직접 들어보기도 했다. 손님 대신 한 시간 거리 서울 고속터미널까지 가서 꽃과 부자재를 사 오고 자신만의 기술로 꽃다발을 만든 친구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그를 상대했다. 꽃집을 여는 것이 두려웠지만, 나는 더 이상 꿈꾸는 일을 미룰 수 없었다. 내 영혼을 갉아먹는 회사일에 몇 년째 시달려 바닥까지 와있었다. 좋아하는 일에 대한 갈증이 너무 심했다. 꽃으로 돈을 벌지 못해도 괜찮다는 생각까지 했다. 평소 기부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꽃꽂이 수업으로 재능기부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꽃꽂이를 시작했다. 내 꿈의 꽃무리는 그렇게 너무나 막연한 모양이었다.

동양꽃꽂이와의 만남

그렇게 혼자 이것저것 꽃에 대해 공부한 지 두세 달이 지났을 때였다. 소셜미디어에서 참고할만한 꽃꽂이 작품 사진들을 구경하던 중, 동양 꽃꽂이 작품을 보게 되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유려한 선과 적은 꽃으로도 오롯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해내는 이 작품들에 매료되어 흠뻑 빠져들어버렸다. 상대적으로 희미한 내 꿈의 꽃잎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고 동양 꽃꽂이 작품처럼 여백의 미가 생겼다. 이 작품들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내 꿈은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케바나 원데이 클래스를 찾아 바로 수업을 신청했다. 서른이 넘어 배우고 싶은 것이 생겨 수업을 듣기로 하다니. 부끄럽게도 직장인이 된 후 학원이라는 걸 다녀본 적이 없었다. 퇴근하면 그저 오늘의 회사일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어 했다. 맛있는 저녁과 달콤한 휴식시간 같은 즉각적인 보상으로 일상을 채워왔다. 직장인의 소중한 토요일 아침, 이케바나 스타일에서 가장 기본적인 직립형인 ‘타테루 카타치’ 모양을 배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업 후 화병과 침봉은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집에 있는 이케바나 화병에 최대한 비슷하게 꽃을 다듬어 꽂아보았다. 팥배나무로 주지를 세우고 데스티니 장미로 객지를 꽂아주고 촛불 맨드라미를 중간지로 꽂아 마무리했다. 나의 첫 동양 꽃꽂이 작품을 완성했다. 아직 좀 엉성했지만, 창피한 마음보다는 계속 더 배우고 연습해서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바로 정규반을 신청할까? 아니면 다른 곳도 수강해볼까? 즐거운 고민을 하는 중, 마음 한편에 뭔가 아쉬움과 찝찝함이 들었다.


백자발 화기에 담은 한국꽃꽂이. 개다리 소반 위에 올려보았다.

나는 그 이유를 금세 알아차렸다. 꼭 이케바나를 배워야만 하는가? 한국 전통 꽃꽂이는 없는 건가? 어렸을 적 집에 있던 침봉이 생각났다. 어머니께 물어보니 예전에 취미로 구청에서 한국 꽃꽂이를 배우셨다고 했다. 한때 한국 꽃꽂이가 유행이었단다. 잘 검색해보니 일본 꽃꽂이인 이케바나 말고 한국 전통 꽃꽂이 학원도 있었다. 왜 한국 꽃꽂이를 배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다른 나라의 동양 꽃꽂이 작품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한국인이기에 더 아름다워 보였다. 왜 일본 이케바나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것인지 의아했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기에는, 큰맘 먹고 구입한 10만 원이 넘는 이 유명 덴마크 브랜드의 화병도 꽃꽂이를 의미하는 일본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명품 화병으로 유명한 너마저…일본어 이름을 가지고 있다니…

영어영문학과 전공병과 수출업무를 담당한다는 직업병이 있는 나는, 해외 사이트에서 그 이유를 찾아다녔다. 구글에서도 ‘Oriental Flower Arrangement(동양꽃꽂이)’를 검색하면 제일 상단에 ‘Chinese or Japanese Styles(중국 혹은 일본 스타일)’이라고 나오기도 했다. 영어로 출판된 이케바나 관련 책들은 인터넷 창 페이지가 넘어갈 만큼 꽤 많고 다양했지만, 그에 비해 한국 전통 꽃꽂이에 관한 책은 검색 결과도 적었고, 당장 살 수 있는 것은 두세 권 정도였다. 많은 소셜미디어에서는 IKEBANA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만든 동양 꽃꽂이 작품을 소개했다. 애국심이었는지 뭔지 알 수 없는 이끌림이었다. 나는 우선 우리나라에서 현재 살 수 있는 한국어로 된 한국 꽃꽂이 책들을 주문했다. 그리고 한국의 꽃 문화에 대한 내용이 조금이라도 목차에 들어있는 전자책들을 검색하여 모조리 찾아 읽어보았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많은 책들이 ‘일제 강점기’ 때문에 우리의 꽃 문화가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35년 동안의 민족문화말살 정책에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한글’마저도 잃을뻔했다. 한국의 어느 전통문화도 제대로 전해지기 어려웠다. 다행히 1960년대부터 다시 그 정체성을 찾는 연구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책에서 본 ‘병화도’나 ‘책거리’에 담긴 소박하면서도 존재감이 확실한 아름다운 꽃무리들을 보며 나는 자연스레, 한국 꽃꽂이를 배우고 싶어졌다. 이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싶다.

여백의 미가 아름다운 한국 꽃꽂이. 동백나무로 주지를 세운 직립형.

꽃꽂이를 처음 시작할 때의 내 꿈의 모양은 막연했지만, 지금은 몇몇 꽃잎들이 떨어져 여백의 미가 생겼다. 내 꿈의 밀도는 더 높아져있었다. 꽃을 만나며 무기력을 극복한 내 일상을 글로 남기고 싶었는데, 특히 담아내고 싶은 내용이 생겼다. 한국 꽃꽂이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꼭 얘기하고 싶었다. 가능하면 영어로도 번역하여 공유하고 싶었다. 소셜미디어이든 아니면 전자책으로라도 만들어서 아마존 전자책 사이트에 업로드하고 싶다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당장 꽃집을 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꽃에 관한 글을 쓰기로 했다. 번역 업무와 해외 시장이 생소하지 않은 영어영문학과 출신 직장인. 한국 꽃꽂이를 알리고 싶다는 동기부여를 장착하고 꾸준히 글을 쓰고 있는 플로리스트 지망생. 내 과거의 점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침 운이 좋았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한국 꽃꽂이 학원에서 입문반을 모집하는 글이 올라왔고 바로 등록했다. 이제 꽃을 열심히 피울 일만 남았다.

이전 06화 이름 없는 들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