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조화 Oct 29. 2022

이름 없는 들꽃

그래도 꽃을 피워야 하는 이유

‘노력 없이 돈을 벌다니, 세상에서 이렇게 짜릿한 건 처음이야.’ 처음 주식으로 돈을 벌었을 때 친구에게 던진 말이다. 돈에 있어 근로소득, 예금과 같은 보수적인 재테크로 살아온 나의 인생에 신변 잡귀라는 엄청난 바람이 불어왔다. 처음엔 잠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세상이 쉬워 보였다. 한동안은. 하지만 1년 정도가 지나자 흐름이 바뀌었다. 나름 분석을 해서 투자를 해도, 주가가 오르는 대세장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었다. 저 태평양 너머 미국 중앙은행에서 금리를 올린다고 하니 내 돈이 우수수, 파란 하늘의 소나기처럼 떨어져 없어졌다. 이런 흐름이 올 것을 파악하고 미리 발 빠르게 내 자산을 빼야만 했단다. 오롯이 외부의 환경 때문에 흔들리는 나의 자산이라니. 이걸 내 것이라고 봐도 될까?


내가 주식에 잠깐 홀렸던 것처럼, 사람은 비교적 쉽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에 더 쉽게 빠진다. 레벨이 낮을 때 오히려 많은 보상을 주며 점점 빠져들게 하는 게임들도 이러한 심리를 이용한 것이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제 인생에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내 온전한 자산이 되는 일들은 그 반대인 것들이 많다. 수능이나 고시 같은 어려운 시험은 물론이고 탁구나 배드민턴 같은 스포츠들도 다 비루한 수련의 시기를 거친다. 날 때부터 다 잘하는 슈퍼 영재가 아닌 이상, 처음엔 다들 공을 수도 없이 떨어뜨리고 줍느라 심신이 지쳐버린다. 너무 못해서 재밌지가 않고 쉽게 포기하게 된다. 내가 계속해도 못 할 까 봐 너무 두려운 나머지, 초보일 때 그만두기도 한다. 열심히 했는데도 못하면 상처를 받을 테니까.


이게 아름다운건가? 아리송하다

나에게 또 그 위기의 순간이 왔다. 오늘 꽃꽂이를 망쳤다. 예쁘지가 않다. 뭘 어떻게 손을 봐야 하지? 꽃이 상할까 봐, 물 내림으로 죽을까 봐 이리저리 많이 만지지도 못한다. 이렇게 소질이 없나? 소셜미디어에선 많은 플로리스트들의 아름다운 작품들이 즐비하다. 적당한 변주를 준 리듬감이 느껴지는 선과 부피감, 색감의 조화도 완벽하다. 내 꽃꽂이는 너무 엉성해서 못 봐주겠다. 또 두려움이 밀려왔다. 열심히 해도 안될 것 같다는 두려움. 이 것도 내 길이 아닌 걸까? 괜히 시간과 돈만 쓰는 건 아닐까? 계속해도 되는 걸까? 온갖 잡생각이 난무했다.


이런 생각으로 인생에서 포기한 것들이 얼마나 많았었지? 셀 수 없이 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수영장에서 물을 먹고 난 후, 더 이상 발이 닿지 않는 두려움을 느끼기 싫어 수영 배우기를 포기했던 날. 배드민턴을 몇 번 치다가 더 이상 공을 주으러 가기 싫어서 포기했던 날. 난 그렇게 평생 수영을 못 하는 사람이 되었고, 취미로 배드민턴을 좀 친다는 얘기도 해본 적이 없다. 아, 그리고… 내 꿈도 그렇게 포기했다. 나름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날도 평소처럼 자신 있게 그림을 그렸었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따뜻한 봄날의 미술시간이었다. ‘그림이… 너무 만화 같아. 특히 사람 얼굴이.’라는 선생님의 평가를 들었다.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지금도 그때의 약간 수치스럽고 혼란스러웠던 감정이 떠오를 정도이다. 내 그림으로 처음 들었던 악평이었다. 만화같이 그리면 이상한 건가? 내가 잘못된 그림을 그렸던 건가? 어떻게 고쳐야 하지? 처음에는 최대한 만화 같지 않게 그리는 법을 연구했다. 초상화를 그리듯이 사람의 얼굴들을 최대한 실제처럼 그려보는 연습을 했다. 내가 평소에 나만의 방식으로 그리던 사람의 얼굴은 이제 내 그림에 없었다. 만화에 나올법한, 눈동자와 속눈썹이 선명한 얼굴은 다신 그리지 않기로 했다. 그 평가 때문에 그림을 포기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확실히 그 이후로 무언가를 그리기 전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그리는 그림이 형편없으면 어떡하지? 두려웠던 나는 흰 종이 앞에서 수도 없이 머뭇거리다가 연필을 내려놓았다.

두려움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시간. 바로 꽃꽂이 시작 직전.

그렇게 인생에 가장 열정을 쏟았던 일도 그만둔 것처럼, 꽃꽂이도 두려움 때문에 그만할 거니?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이렇게 꽃꽂이를 계속 연습해도 나중에 어느 누구도 예쁘다고 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다행히도 고민은 금방 끝났다. 계속하기로 했다. 칭찬받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만든 꽃꽂이 작품은 확실히 다른 유명 플로리스트의 작품들보다 부족한 것이 확실했지만, 그저 좋았다. 계속 바라만 보고 싶었다. 내 새끼는 객관적으로 볼 필요 없이 그저 날 닮았기에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울 뿐이다. 반대로 영혼 없이 했는데도 잘해서 칭찬받는 것들이 있다. 회사일이 그렇다. 내 기준에서는 일이 주어졌을 때 욕이라도 먹지 않으려고 열심히 해서 꽤 좋은 성과가 날 때가 있다. 칭찬받았다는 생각에 아주 잠깐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그 뿌듯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만드는 작품은 어딘가 부족하더라도, 누가 칭찬해주는 것도 아니지만 계속 보게 되고 뿌듯함이 느껴졌다. 자꾸 눈길이 간다.

클로드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에 있던 꽃들 - 아네모네와 수레국화, 작약으로 만든 실크 플라워 부케. 하얀 도자기 화병에 담아보았다.

그래, 계속해보는 거야! 한 달, 두 달, 세 달, 출근 전과 후에 틈틈이 책으로 공부하고 눈으로 익히면서 꽃을 만졌다. 그리고 다섯 달이 지났다. 기능사 시험 준비를 위해 등록한 꽃 학원에서 선생님의 칭찬을 들었다. 형태가 잘 나왔다며 다른 수강생들에게 내 작품을 보고 참고하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었다. 실력이 늘긴 늘었나 보네. 아직 한참 부족한 실력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서 실력이 늘었다는 그 사실 자체로 참 뿌듯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칭찬까지 받게 되는 것은 축복이다. 아, 이래서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걸까? 지금은 못 하지만 연습을 통해 잘하는 것으로 바꾸려는 노력은 그 일을 좋아해야만 지속할 수 있다. 좋아하는 일이라 꾸준히 할 수 있고, 계속하다 보니 실력이 쌓여 잘하게 된다. 그리고 실력이 너무 더디게 늘면 또 어떤가. 그동안 좋아하는 일을 했으니 그 시간은 효율성으로는 따질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지루한 회사일과는 달리 꽃을 만질 때는 아무 딴생각이 나지 않았고, 매번 식탁과 거실 테이블에 놓인 꽃은 시선을 둘 때마다 행복을 주었다. 매일매일 나만의 비공식 꽃 축제를 즐겼다.  


연필이든, 포토샵이나 일러스트 같은 프로그램으로도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과거 미대 지망생. 미술학원이나 미술대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하고, 독학으로도 수련하지 않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말만 거창한 예술가 지망생. 그런 내가 지금 당장 배우고 싶은 ‘기술’이 생겼다. 비루한 수련의 시기를 견딜 수 있을 만큼 좋아하는 일. 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표현하는데 ‘꽃’을 빌리기로 했다. 그토록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꽃으로’ 그리기로 했다. 타고난 재능이 있는 사람은 소수이고,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처음 꿈을 꾸기 시작할 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나 예체능계일수록 타고난 재능의 편차는 노력으로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이루고 싶은 소중한 꿈을 찾았다면,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한번 도전해볼 만하다. 우리에겐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 열정이라는 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메마른 감정으로 간신히 해내는 다른 무엇과는 다르게 더 오랜 시간을 연습할 수 있고, 더 나은 도구와 방식이 있는지 더 진지하게 고민할 것이다.


국립 현대미술관 전시 ‘문신:우주를 향하여’ 중에서. 서른 넘은 평범한 직장인은 아직도 꿈을 꾼다. 어릴적부터 지금까지 예술가가 되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다.

노래실력이 부족한 아이돌이 다른 장기를 찾아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혹자는 어떻게 노래도 못 하는 사람이 가수가 된 거냐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난 오히려 그들이 더 칭찬받고 주목받았으면 좋겠다. 노래가 부족해도 모든 무대에서 최선을 다하는 아이돌 친구들은 우리가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이 장미로 태어나지는 않는다. 비록 이름도 없는 들꽃으로 피어나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 그저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우는 일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꽃을 피우다 보면 누군가는 우리에게 이름을 붙여줄 수도 있겠지. 아니더라도 괜찮다. 난 나만의 꽃을 피웠기에 행복할 테니까.


이전 05화 죽어가는 것에 물 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