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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조화 Oct 29. 2022

뿌리깊은 꽃

식집사 초보가 시작하기 좋은 한국 전통 꽃꽂이

아메리카노와 평양냉면의 공통점

이번 여름도 너무 덥다. 조금만 걸어 다녀도 저 아래에서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열감과 그로 인한 타는 듯한 갈증. 얼음이 컵 안에서 굴러다니는 소리가 그리워 카페에 들렀다. '고소한 오트밀크를 넣은', '달달한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올린' 다양한 여름 시즌 한정메뉴들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살짝 보리차 같은 맛이 나는 물과 얼음을 가득 담은 연한 아메리카노. 특별하지 않고, 정말 강렬하게 맛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없지만, 그래서 쉽고 빠르게 목에 가득 담을 수 있는 투명한 오아시스 같은 맛.


평양냉면도 나에게 아메리카노와 같았다. 함흥냉면처럼 양념장이나 고소한 깨 등이 들어있지 않은 연한 고기 국물의 맛. 고소한 메밀면과 함께 훅훅 들어가는 시원하고 깔끔한 맛. 북한에서도 기호에 따라 평양냉면에 식초 등을 넣는다는 사실은 워낙 알려지긴 했지만, 아직도 아무것도 넣지 않은 순수한 맛 자체로 이 냉면을 즐기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대표적으로 평양냉면 맛집만 찾아다니는 내 동생)


그리고 이번엔 '한국 꽃꽂이'란 것이 나에게 그런 존재로 다가왔다. 무심한 듯 툭 꽂은 것 같지만 그 몇 안 되는 '선'이 만드는 유려한 조화로움과 적당히 꽂아진 감초 같은 꽃.


그 적은 소재들만으로도 오롯이 자연을 표현해낸다.
진짜 우리가 보는 자연처럼, 수수한 아름다움


그리고 이러한 완전체 자연을 담은 아름다운 화병들 - 둥글둥글 모난 곳 없는 아기 궁둥이 같은 매끈한 달항아리, 동그라미가 넓적하게 귀엽게 눌린 수반, 마치 흙의 입술을 형상화한 것 같은 옴패기 등등. 한국 꽃꽂이 작품의 뿌리가 되어 그 수수한 아름다움을 배로 느끼게 해 준다. 화려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지만, 마치 자연이 평소에 나에게 보여주던 편안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은 꽃무리의 모습에 나는 깊이 매료됐다.

연밥으로 주지를 세우고 메리골드로 수반을 채운 한국꽃꽂이 직립형.


한국 꽃꽂이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나는 단순히 신토불이를 넘어서 한국 꽃꽂이가 자연을 집으로 들이려는 초보 식집사들에게 아주 좋은 힐링 취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를 4가지로 추려보았다.


첫 번째, 꽃과 나무의 사용이 적어서 경제적이다


꽃과 식물을 집으로 들여오기로 한 초보 식집사들 모두가 식물농장이나 꽃시장과 가깝게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요즘엔 온라인으로도 저렴하게 농장 직배송을 받을 수도 있지만, 원래의 소비패턴에서 안 사던 것을 사는 건 한 달에 한두 번 1-2만 원씩이어도 부담스럽다. 계속 물을 주고 가꿀 수 있는 식물 구매를 제외하고 오롯이 '꽃꽂이' 분야에서 비교하자면, 한국 꽃꽂이는 풍성하고 다양한 꽃을 사용하기보다는 아예 한 가지 단일 꽃을 사용하거나 2-3가지 종류의 꽃만 한 화병에 담는다. 그 개수도 화병의 크기에 비해 매우 적다. 화병의 높이와 넓이, 깊이를 채워주는 것은 꽃 같은 초화류보다는 '주된 가지'라고 불리는 '주지' 3개와 그보다 작은 키의 보탬 가지인 '종지'들인데 이것들은 보통 나뭇가지가 사용된다. 이런 절지류는 특히나 꽃에 비해 생명력도 길다.


꽃시장 정기 휴무 바로 전날에 꽃을 사러 갔었다. '마지막 한 단 만원에 줄게요.' 하며 휴가 전 마지막 꽃을 모두 팔려는 사장님들 사이에서 유독 여유로워 보이는 사장님을 보았다. 바로 '소재'집. 꽃 매대들은 이제 거의 바닥을 보이는데, 이 소재집 사장님은 저 벽까지 잔뜩 쌓여있는 다양한 나뭇가지들을 그대로 두고 휴가를 갔다 오시려나보다. 원목가구들이 일주일 사용했다고 썩지 않는 것처럼, 한국 꽃꽂이에 주로 쓰이는 나뭇가지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물론 함께 달려있는 잎과 열매들은 떨어지겠지만 그 주된 '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두 번째, 초보자들이 따라 하기 좋다.

한국 꽃꽂이는 꽂아야 하는 나무와 꽃의 양이 적다. 주지 3개와 종지 9개, 그리고 꽃 3송이 정도만 규칙에 맞게 잘 꽂아도 기본적인 한국 전통 꽃꽂이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그만큼 하나하나 집중하여 정성을 들여 꽂아야 하겠지만, 그건 서양 꽃꽂이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꽃의 양이 많은 서양 꽃꽂이 작품은 그만큼 실수할 거리가 더 많기 때문에 감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꽂는 내내 혼란스러울 수 있다. 노력 대비 성과가 큰 일만 쫓아다니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꽃꽂이에서도 결국 가성비 좋은 방법을 찾아내버렸다. 화병의 높이와 너비에 따라 1주지의 길이가 정해지면, 규칙에 따라 2주지의 길이가 정해지고 이어서 3주지의 길이가 정해진다. 이러한 규칙들은 처음에는 헷갈리고 까다로워서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꽃꽂이가 막막한 초보자들에게 아주 좋은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    


세 번째, 여백의 미를 살리는 디자인으로 집 내부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소품들이 가득한 집. 또는 화려하고 강렬한 색의 벽지와 다양한 조형물이 가득한 집. 이런 '색'과 '오브제'가 많은 집이 아닌 심플한 '모던 스타일' 집이라면, '여백'의 미가 있는 한국 꽃꽂이 화병을 놓기에 제격이다.

거실장에 올려둔 한국 꽃꽂이 작품. 튀지 않고 조용하게 집 인테리어와 어우러진다.

아무리 꽃이 많이 피는 봄이라도, 절대적인 꽃의 숫자는 나무보다 적다. 그 '자연의 비율'은 한국 꽃꽂이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존재감 있는 주된 가지와 함께 필요한 만큼만 화룡점정으로 꽂아진 꽃과의 조화로운 모습은 화병 또는 바구니에서 쏟아질 듯 흘러내리는 스타일의 꽃꽂이 방식에서는 볼 수 없던 전혀 다른 아름다움이다. 꽃이 적어도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꽃이 적기 때문에 내부 인테리어가 심플한 집일수록 더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튀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존재감을 뽐내는 우리의 자연처럼, 한국 꽃꽂이 화병은 어디에다 두어도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무의 선은 오래도록 살아남고, 함께 꽂아진 꽃이 조금 머리를 내려도 티가 많이 나지 않아 당황스럽지 않다. 한 번에 우르르 시들어버려 아쉬웠던 꽃이 많은 꽃바구니와는 달리 이들은 우리와 아주 느린 속도로 이별을 하게 된다.

마지막 이유, 우리는 애국심을 우리의 에너지원으로 이용할 수 있다.

애국심을 이용한다니. 조금 과격한 표현이지만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 것 같다. 사람은 어떠한 일을 하는데에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이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무기력할 땐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도 그 마음만으로는 몸을 일으키기 부족할 때가 있다. 취미생활에서 뿌듯한 감정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본업이든 취미이든 의미 있다고 느껴지는 일을 하는 것. 우리의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 우리의 뿌리 깊은 문화는 알다시피, 기구한 면이 있다.


우리 한국의 전통문화는 무엇 하나 쉽게 전해질 수 없었다. 꽃 문화까지도.
남산 밑에서 만난 무궁화. 아주 얇지만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고운 빛깔의 꽃잎이 인상적이었다.
일본은 지금 우리나라의 국화(國化) 무궁화를 모두 뽑아 없애고 대신 벚꽃을 심으면서 선전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남궁억 선생은 우리나라의 꽃인 무궁화를 퍼뜨려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학생들의 실습 장소에 뽕나무 묘목과 함께 무궁화 묘목을 심어 길렀다.


무궁화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던 남궁억 선생을 기리는 홍천 '남궁억 기념관' 소개글에 있는 내용이다. 자연에서 자유롭게 핀 무궁화마저도 한국의 정신을 상징한다며 불태워버렸던 일본의 민족말살정책 아래에 하물며 '꽃을 꽂는 방식인 꽃꽂이 문화'가 잘 지켜질 수 있었을까.



한국 꽃꽂이에 대한 책 자체가 몇 권 없는데, 그 책들의 서론엔 이 일제강점기 시대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3년도 아니고 35년이다.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려는 방법이 글이든 그림이든, 온전히 100% 전해지기엔 변수가 너무나도 많다. 하물며 이를 없애기 위한 적들의 몇십 년간의 통치 밑에서 보존해내는 것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조선어학회의 연구로 힘들게 지켜낸 훈민정음이 이제는 '돌민정음'이라고 불리며 KPOP 문화와 함께 널리 퍼지고 있는 바야흐로 한류의 시대다. 너무나 익숙해서 몰랐지만 그 기원과 쓰임이 훌륭한 우리의 한글처럼 우리의 꽃꽂이 문화도 현대적인 방식으로 널리 알려질 기회가 있다면 전 세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것. '백자&청자 이야기'와 '조선의 멋'을 가장 잘 알아볼 사람은 우리 한국인이다. 잃어버린 우리의 꽃 문화를 찾겠다는 사명감 없이도 한국 전통 꽃꽂이 작품은 충분히 아름답다. 그저 나의 일상에서 시도하고, 아름다움에 빠져보자.

동백나무를 주지로 세운 한국꽃꽂이 경사형.


그리고 이왕이면 SNS에 나의 작품을 공유할 때 'KoreanFlower', 'KoreanFlowerArrangement', 'KoreanFloralDesign' 'COCOJI' 등의 태그를 꼭 넣어주면 좋겠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많은 나라들에 자신들만의 고유한 화예 스타일을 가르치는 수업 커리큘럼과 자격증이 있다. 우리나라도 한국 전통 꽃꽂이 수업과 이에 부여되는 자격증이 있는데, 아직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진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도 세계 각국의 유학생이 꽃을 배우러 오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소셜미디어에 우리 한국 화예 작품 콘텐츠가 많아지는데 아주 조금만 일조해보자. 내가 좋아서 하는 취미활동도 몸과 마음이 힘들 땐 그저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일상에서 꽃을 보고 싶다면 생각보다 부지런해야 하는데, 이 애국심이라는 동기부여가 생각보다 큰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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