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을 여행하는 법
'There are always flowers for those who want to see them' - Henri Matisse
'꽃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겐 어디에나 꽃이 피어있다.' - 앙리 마티스.
뉴욕에서 노을을 보고 기숙사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과거 대학생 때 교환학생으로 약 8개월간 뉴욕주에 살았지만, 우리가 보통 대도시 하면 떠올리는 뉴욕시티로 가려면 약 2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그 화려한 도시에 도착하기까지 기차에서 보는 풍경은 황량한 시골 풍경과 간간이 보이는 조금은 정형화된 미국식 목조주택들 뿐이었다. 주말에 맨해튼으로 도시 여행을 갔던 나는 허드슨 강변에 앉아 뉴저지 쪽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했었다. 구름 한 점 없던 날의 선명한 주황빛 하늘에 매료되어 멍하니 시간을 보낸 후 나는 서둘러 기차역으로 향했다. 또 두 시간을 달려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야만 했다. 기차의 창밖은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귀갓길이 더 아쉽고 울적해졌다. 그러다 중간의 정차역 주변으로 들어서니 갑자기 환한 빛이 보였다. 역 주변의 가게들 간판 빛이었다. 그중 나에게 제일 친근한, 흰색과 분홍색과 주황색이 어우러지는 반가운 도넛 가게 간판이 눈에 띄었다. 피곤한 얼굴의 미국 경찰이 도넛을 냠냠 먹고 있을 것 같은 가게의 간판을 보며 생각했다. 귀엽다. 저 색도 예쁘네. 조용히 실소하던 나는 문득 의문이 생겼다. 이런 평범하고 흔한 것들만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어떨까? 오늘 내가 맨해튼에서 보고 왔던 노을만이 그렇게 특별한가? 저기도 주황색이 들어가 있고 충분히 예쁜데? 사실은 세상에 예쁜 것들이 넘쳐나는데 나는 감동받아야 마땅한 것들을 편견으로 정해놓고 골라서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꼭 여행지에서 보는 것들만이 예쁜 것은 아닌데. 앞으로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에 너무 무뎌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30대 직장인이 되어 그 어린 대학생의 생각을 돌이켜보니,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은 날이었다. 사실 그 후 현실로 돌아오고 나서는 그 깨달음을 계속 잊고 살았다. 하지만 아직도 10년 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 것을 보면 나는 계속 그렇게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작은 것도 아름답게 느끼고 매일 소소한 행복에 감사해하는 삶 말이다.
다우어 드라이스마의 책 ‘나이가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에코리브르, 2005년)에서는 말한다. 다양하고 새로운 경험들로 계속 자극을 받는 유년기에 비해 비교적 반복되는 삶을 사는 어른들은 도파민이 줄어 생리시계가 느려지기 때문에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이 느끼게 된다고. 퇴근 후 지친 몸으로 간신히 배달음식을 먹고 유튜브를 보며 잠들었던 지난날.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갔다. 아무 노력 없이도 매년 먹게 되는 내 나이는 나조차도 생소하게 느낄 만큼 빠르게 높아져있었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의 나는 무기력의 늪에 빠져 있었다. 1년에 몇 번 가지 못했던 여행은 유일한 낙이었다. 아무리 무기력한 사람이었어도 여행할 땐 무기력을 잊었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신선한 자극을 받기도 하고, 회사를 떠나 휴가 중이라는 생각에 기본적으로 들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비행기 티켓을 검색해보며 떠나려는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런 행복한 도피생활의 시간은 절대적으로 적었다. 여행이 주는 에너지와 행복감은 잠깐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또다시 출근길에 저 가드레일을 박고 입원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삶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회사 다니는 일상’도 여행하듯이 행복하게 살 순 없을까? 그렇게 매일 여행 갈 궁리만 하는 일상을 살다가, 자연을 만났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푸르름의 채도와 명도가 달라지는 나무들, 달마다 다른 꽃을 피우는 주변의 자연을 관찰하며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꿈꾸는 사람의 일상은 마치 여행 중인 사람의 하루와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상일지라도 자연을 보고 있으면 하루하루가 다른 하루임을 보여준다. 마치 여행하듯이, 아주 작지만 새로운 자극을 느낄 수 있다. 봄이 오면 강렬한 색의 튤립과 연분홍 벚꽃을 시작으로 연보라색 라일락과 다홍색 철쭉, 그다음 하얀 이팝나무의 꽃을 지나 푸른 수국의 계절이 온다. 곧 주황빛 능소화가 피기 시작하고 또 한 달이 지나면, 연한 색이지만 늠름한 무궁화와 붉은 백일홍이 만개한다. 생각보다 도시의 조경은 이 모든 아름다움을 우리가 계속 볼 수 있도록 촘촘하게 계획되어 설계되었다. 여행을 하며 새로운 것들에게 영감을 받고 에너지를 얻듯이, 어제와는 다른 꽃과 나무들을 관찰하며 일상을 여행하고 있다.
일상 속 자연을 관찰을 시작하고 많은 꽃들의 이름을 알고나서부턴 그 행복감이 더 비례하여 커졌다. 어플을 통해 사진을 찍으면 꽃 이름을 알려주는 문명의 발달 덕에 내 머릿속 꽃 사전은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다. 특히 여름부터 가을까지 쭉 꽃 수업을 들어왔던 나는 이맘때쯤 피는 계절꽃을 아주 많이 알게 되었다. 수업 때 보아왔던 친구들을 길가에서 발견했다.
메리골드구나! 너는 향이 참 좋지. 분명 작년 이맘때는 이 꽃을 보고 그냥 꽃이라고 생각하고 넘겼을 텐데, 이제는 이 아이의 이름을 안다. 춘천에 있는 카페에 갔을 때였다. 감자빵을 팔아서인지 동그란 감자같이 생긴 꽃을 300평 가까이 심어놓은 이 광기 어린 맨드라미 밭을 보고 나는 감탄과 동시에 행복했다.
난 이 인간의 뇌를 닮은 사랑스럽고 보드라운 것의 이름을 알고 있다. 주먹 맨드라미. 바로 얼마 전 한국 꽃꽂이 수업에서 만졌던 꽃이기 때문에.
이번 가을, 길가 여기저기에 피어있는 맨드라미를 수없이 만났다. 생각보다 흔한 꽃이었다. 분명 이 꽃을 난생처음 본 것이 아닐 텐데, 수업에서 배우기 전에는 본 적이 없는 꽃 같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데 꽃도 그렇구나. 나는 처음으로 그들을 만나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꽃들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나서 보는 꽃의 아름다움은 배가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한 행복감도 배가 된다. 앞으로 계속해서 꽃을 배우는 것이 기대된다. 그들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자주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꽃과 함께 꿈을 그려나가는 요즘의 일상은 여행할 때처럼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꿈이 생긴 후, 내 일상엔 그 꿈에 맞는 목표와 계획들이 채워졌다. 이건 꼭 먹어보기로 했는데! 이곳은 꼭 가보기로 했는데! 시간 맞춰서 갈 수 있을까? 여행 일정표를 짜는 것처럼 긴장이 생기면서도 설렜다. 올해 이루고 싶은 단기적 목표는 너무 쉽지도 어렵지도 않고 현실적이었다. '생활 꽃꽂이를 추천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화훼장식 기능사 자격증을 따야지.' 직장인의 한정된 시간에 내가 계획한 것을 꼭 하고 싶어 저절로 미라클 모닝을 시작하기도 했다. 요즘 인기라는 드라마나 영화 시청도 무한정 미뤄두었다. 하루에 두 시간 정도는 내 꿈을 위해 썼다. 그리고 그에 따른 작은 결과물과 기록물이 남았다. 꽃을 사는 사람에서 꽃을 파는 사람이 되었고, 유튜브 영상 시청자에서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고, 글을 읽던 사람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소비자에서 생산자가 되는 이 작은 성과는 꽃과 함께 일상을 여행하기 시작한 후로 이룬 것들이다. 그 과정과 결과들이 내 하루하루의 일상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난 더 이상 주말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습관처럼 숙소나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지도 않는다. 더 이상 여행으로 도피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 매일의 일상에서 끊임없이 설렘과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꽃을 만나길 정말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