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면 뭐하니?"의 역설, 장자의 "소요유"

낭송장자 2

by 이제이

우응순 선생님과 함께 하는 “낭송 장자” 두 번째 수업에서는 장자의 “소요유(消遙遊)”, 즉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기, 유유자적하기에 대한 주제에 대해서 다뤘다. 세상이 재단한 유용(有用)한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무용(無用)한 것일지라도 각자가 즐기면서 만들게 되는 유용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대용(大用)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주제였다. 어떠한 목적을 두고 그것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삶에 지향점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닌 세상적인 것에 의해 재단된 것이었다면 그것을 이룬다 한들 성취감은 잠시일 뿐이다. 그러다 또다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목표를 리셋한 채 달려가야 하는 일들의 반복된 현실은 때론 우리를 숨 막히게 한다.

현 사회는 “노는 사람”보다 “놀 수 있는 사람”을 지향하게 한다. 따라서 그 사회 속에 유용한 사람이 되었다 할지라도 언제든 무용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일해야 하는 경쟁의 쳇바퀴 안에서 “놀 수 있음”은 이루고 싶은 꿈이다. 왜냐하면, 유용의 가치를 최고로 하는 사회에서의 “놀 수 있음”은 자신의 유용 가치를 증명해 보이는 하나의 표식이 되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가치 안에서의 “놀 수 있음”의 표식은 경제적, 사회적 성공으로 보여질 수 있는 명품쇼핑이 되기도 하고 호화로운 호텔에서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는 호캉스가 되기도 하며 멋진 외제스포츠카를 몰고 드라이브할 수 있는 삶이 되기에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유용의 가치 안에서 허우적댄다..

반면에 게으름과 무능력의 상징이 되어버린 현 사회에서의 “논다”라는 말의 부정적인 인식은 우리 삶을 지배한 지 오래다. 공부하지 않고 노는 자식은 학벌 지상주의 세상에서 살아가기 힘든 미래를 담보하는 듯한 말이 되었고 직장을 가지지 못한 채 노는 사람은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낙오된 무능력한 사람이 되었으며 직장맘이 아닌 전업주부는 “노는 아줌마”가 되면서 가계에 경제적인 기여를 하지 못하는 비생산적인 사람이 되었다. 이 모든 “노는” 부류들은 이 사회가 추앙하는 출세,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기에 어느새 “논다”라는 말은 드러내 놓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말이 되었다.

주말마다 내가 즐겨 보는 예능 TV 프로그램 중에 “놀면 뭐하니?”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유재석은 끊임없이 자신이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분야를 시도하며 열심히 노력하여 그에 따른 다양한 결과물들을 만들어낸다. 사실, 유재석의 노력과 도전, 열정에 흥미롭게 보는 프로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나는 그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놀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놀면 뭐하니?”라는 말에 불안감과 압박감을 느끼며, 결국 내 삶에 엄습하는 “논다”의 부정적인 인식을 재확인한다. 어쩌면 그 프로는 마치 현 사회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지시켰던 “놀면 안 돼”라는 의미를 완곡하게 표현한 제목을 가지고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도록, 또는 뭔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을 지속적으로 주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는 주말 쉬는 시간일지라도 내가 그러한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놀고 있는” 나를 대신해 열심히 무언가를 해주고, 이루어내고 있는 유재석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는 대리만족을 느끼며 놀고 있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 위안을 삼을 수 있으며 그것이 곧 이 사회에서 내가 “놀고 있는” 부류에 속한다는 것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점점 더 대학이라는 곳이 사회에 적합한 인재를 만들어내는 유용성을 강조하면서 대학강의 자리도 영문학을 전공한 나와 같은 문학도 보다는 같은 인문학도라도 영어교육학도가 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결국, 내가 “노는” 부류가 될 날도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얼마 전 나는 뉴스에서 국가 경쟁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반도체 인력이 부족하게 되면서 국가에서 나서서 대학에 반도체 학과 개설을 요구하고 있다는 상황을 접했다. 이러한 현실은 취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문학도들을 “문송하다”, 즉 “문과라 죄송하다”라는 말로 그들의 가치를 무용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인문학도는 사회가 요구하는 유용한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하는 “노는” 부류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장자는 “논다”라는 말의 전복(顚覆)을 시도한다. “소요유”가 만들어내는 힘과 에너지를 무한 긍정하며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가 재단하는 유용의 가치의 유한성을 깨닫게 한다. 장자의 소요유는 더 이상 그러한 유용의 사회적 가치를 거부한다. 장자는 개인이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따라 “유용의 가치”를 정할 때 그 삶은 무용이 아닌 유용, 즉 대용이 될 수 있는 무한 가능성이 있음을 재확인한다.

장자는 “나비의 꿈”에서 자신이 꿈에서 본 나비가 자신이 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나비가 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 자신과 나비의 구분은 있다고 말한다. 나비처럼 훨훨 날기를 원하는 우리가 있다면 그 나비의 자유로운 날갯짓이 부러워 나비가 되기를 좇기도 하고 나비는 오히려 그러한 인간이 부러워 인간이 되고자 하는 꿈을 꾼다. 이렇듯 각각은 각기 다른 자신의 본래 가치를 망각한 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만 치중해 서로를 부러워하고 욕망한다. 즉, 각 대상이 욕망하는 것이 자신이 갖지 못한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끊임없이 각기 다른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부정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족한 면과 결핍된 부분만을 채우려 애쓰게 되고 결국 그것이 장자의 소요유를 방해한다. 장자의 소요유는 우리의 삶 속에 항상 살아 숨 쉬며 우리의 각박한 현실에 쉼이 되고 궁극적인 행복이 될 수 있었음에도 세상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논다”의 의미를 게으름, 무능력이라는 한가지 의미로 규정해 버림으로써 오랫동안 우리의 삶에서 배제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젠 우리는 그러한 소요유의 삶이 각박하고 치열한 현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쉼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즐거움과 행복의 본질임을 자각한다.

장자의 소유유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에 사회적 가치에 매몰되지 않은 개인의 가치와 개성을 중시한 미국의 초절주의자 데이비드 헨리 소로우가 말한 다음의 행복과도 맞닿아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각기 가지고 있는 본래의 가치와 의미가 “유용”한가 아닌가의 의미로만 산정될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기의 소중한 가치와 개성을 망각한 채 세상적인 “유용”만을 욕망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세상적인 가치와 행복이 합당하고 최선인 듯 좇는다. 그러나 우리가 꾸는 꿈은 각자 가지고 있는 구별된 가치와 본질의 차이를 인정하는 테두리 안에서 각자의 꿈은 자유로울 수 있으며 더 이상 세상적인 것에 맞추어진 천편일률적인 가치관이 자신의 가치를 재단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이 비난하는 “노는” 부류가 됨의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그 노는 것을 즐길 줄 아는 과정 중에 본래의 “나”를 마주하게 되면서 진정한 나의 즐거움과 행복의 종착지에 닿길 바라본다.

“Happiness is like a butterfly; the more you chase it, the more it will elude you. But if you turn your attention to other things, it will come and sit softly on your shoulder.” – Henry David Thor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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