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책 읽기 북클럽에서 올해에는 계몽주의 철학자들 위주로 홉스, 로크, 루소에 이르는 정치철학 분야의 저서들을 읽으며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현시대의 정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17세기 말, 그들이 처한 세상의 부조리와 혼란스러움을 타계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하며 세상의 변화를 외쳤던 각각의 철학자들의 고심과 분투가 그대로 그들의 저서에 묻어나는 것 같아 때론 가슴 뭉클함을 때론 그들에 대한 경외스러움이 함께 찾아왔다. 지금의 현실에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너무나 쉽게 이야기하는 용어가 되어버린 자유, 평등, 행복이란 단어가 그 당시에는 얼마나 모든 이에게 낯설고 기득권자들에게는 얼마나 그들의 세상을 위협하는 위험한 용어였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 단어들이 가진 무게감은 더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들의 사상으로 인해 결국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의 독립혁명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세상은 기존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시발점이 되었다.
수백 년이 흐른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물론 그 당시와는 차원이 다른 자유, 평등, 행복을 가까이 느끼며 그 말의 무게감에 얼마나 공감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고민은 그들의 책들을 읽는 내내 계속됐다. 21세기 "신자유주의"라는 명명아래 새로운 "자유"에 대한 개념으로 평등과 행복이 퇴색되어 가는 현실을 보기도 하고 "평등"이란 이름으로 "능력주의"가 최고의 기치가 될 때 소외되고 배제되는 사람들을 외면해야 했으며 "행복"이란 단어에 우리는 오히려 세상적 행복에 눈이 멀어 워크홀릭이 되고 물질적 풍요를 삶의 질의 최우선으로 삼는 삶을 살고 있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나이가 드니 자유, 평등, 행복이란 단어 중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행복"이란 단어에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문득문득 하게 된다.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자문하며 가끔씩 브레이크를 걸어보는 요즘, <사회계약론>을 쓴 루소의 자서전적 에세이집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통해 철학자라는 무게감에서 벗어난 인간 루소의 말에 귀 기울여 본다. 개인적으로 불운한 삶을 산 루소가 노년을 지나면서 생의 마감전까지 쓴 그의 고백록 같은 글들은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며 치열하게 살아왔던 신념의 젊은 나날들에 대한 회한과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소외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의 생애를 되돌아보며 루소, 자신에게 침잠하며 쓴 글이기에 새삼 정신없이 살아온 나의 삶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해 주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는 흐름 속에 있다. 거기서는 변함없이 일정한 모양을 보존하는 존재는 하나도 없으며, 또 외부세계의 사물에 결부되는 우리의 감정도 필연적으로 이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변한다. 우리의 감정은 언제나 우리 앞에 있거나 뒤에 있어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을 회상하고, 십중팔구 있을 수 없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이 세상 사람들은 일시적인 쾌락을 맛볼 수 있을 따름이다. 영속되는 행복이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 사정이 이런데 우리의 마음을 여전히 불안하고 불만스럽게 만드는 상태, 지나간 옛날의 그 무엇인가에 집착하도록 만들거나 미래의 그 무엇인가를 바라게 만들거나 하는 덧없는 상태, 그런 순간적인 상태를 어떻게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영혼이 튼튼한 자리를 발견하고 거기서 완전히 휴식하며 스스로의 모든 존재를 집중할 수 있어서 과거를 회상할 필요도, 또 미래에 대해 염려할 필요도 없는 상태, 영혼에게 시간이 아무 의미도 갖지 않는 상태, 현재가 영원히 계속되고 또 그 지속성을 느낄 일도, 그 지속이 흔적을 남 길일도 없고, 결핍이나 향유, 쾌락이나 고통의 감각, 소망이나 공포의 감각도 없고, 오직 있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뿐이며 이 감각만으로도 모든 존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상태가 계속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생 피에르 섬에서 고독한 몽상에 잠기면서, 또는 물결 따라 흘러가는 배 안에 누워서, 또는 물결이 철썩이는 호숫가에 앉아서, 또는 아름다운 냇물 곁이나 모래 위를 속삭이며 흐르는 시냇가에 앉아서 때때로 맛본 상태야 말로 바로 이런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은 대체 무엇을 즐기는가?
그것은 자기 밖의 무언가가 아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의 존재뿐이다. 이 상태가 계속되는 한, 사람은 신처럼 스스로에게 만족한 상태에 머무른다. 어떤 정념도 없는 그러한 존재의 감정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평온함을 방해하러 오는 온갖 관능적이며 세속적인 인상을 떨쳐 낼 줄 아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평안하고 만족스러우며 고귀한 감정일 것이다." -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다섯 번째 산책> 중에서
루소는 이렇듯 행복이란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하는 그 순간 안에 존재하는 듯 보인다.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렸을 때 유일한 안식처가 되는 자신과의 진솔한 대화는 그에게 행복이란 감정으로 위안을 주는 듯하다. 이러한 루소의 상황에서 벗어나서 생각해 보더라도 우리는 휘몰아치는 세상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정작 그 속에서 나를 찾아 진정으로 나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게 어렵고 어색하여 오히려 외면하기까지 한다. 따라서 나도 모르게 세상의 행복 속에서 나를 이리저리 부유하게 한다. 루소가 말한 "자기 밖의 무언가가 아닌, 자기 자신과 자기의 존재"를 인식하고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불변의 진리에 용기 내어 대화를 시도하는 행위는 루소가 말한 행복하고 고귀한 감정의 일면에 조금이나마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행복이란 불변하는 상태이므로 이 세상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듯하다.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는 흐름 속에 있으므로 그 무엇도 불변의 형태를 취할 수 없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 우리 자신도 변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오늘 사랑하고 있는 것을 내일도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행복을 구하려는 우리의 계획은 모두 덧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적 만족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을 마음껏 누리자. 우리의 잘못으로 놓쳐 버리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렇지만 그것을 사슬로 묶어버리는 그런 계획은 세우지 말도록 하자. 계획은 참으로 미친 짓이니까." -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아홉 번째 산책> 중에서
루소는 행복은 이세상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며 행복을 구하려는 계획은 환상이라 말한다. 단지 매일을 사는 우리는 그 순간순간마다 정신적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한 감정을 누릴 수 있음을 암시한다. 루소가 말한 것처럼 거창한 행복이란 허상에 사로잡혀 행복 추구를 위한 거대한 계획과 성취목표를 세우는 사람들은 어쩌면 숲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정신적 만족감을 누리는 것이 아닌 나무 하나하나에 얽매여 결국 그것의 생사에 목메어 울고 웃으며 자신을 소진해 버린다. 또한 자신이 일구어 놓은 숲도 만족스럽다 인식하지 못한 채 지속적인 행복 좇음만 반복하게 되는 실수를 저지르다가 지치기 일쑤이다. 새삼 "행복추구"라는 말속에 얼마나 나를 잊으며 그것을 향해 달려가기만 했나 하는 많은 시간들이 스쳐 지나가며 이제는 "행복하다"라는 자족감에 하루하루에 충실한 삶을 살고 싶다는 결론을 내려본다. 또한 그러한 삶에 나를 부유케 할 수 있다면 나는 분명 미치지 않은 행복감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리라.